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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신 Dec 12. 2021

백일 된 아이 엄마의 다리가 부러진다면?

엄마가 아프면 안 되는 이유

엄마는 아프면 안 된다. 이 소리는 언뜻 들은 적이 있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돌봐줄 수 있지만 엄마가 아프면 봐줄 사람 없이 두 배 더 힘들기 때문에 감기게 걸리지 않아도 수시로 쌍화탕을 마신다는 이야기도 웃으며 들었었다. 그냥 다리가 부러져도 힘든데 뒤집지도 못하는 아이가 있는 엄마의 다리가 부러진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지금이 되어서 너무나도 기쁘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우리 집으로 오지 못하고 시골에 있는 친정집으로 바로 가서 석 달간 몸조리를 했다. 친정집에는 출퇴근을 하는 아빠만 있고 엄마는 주중에는 도심에서 지내고 주말에만 시골 친정집으로 올 수 있었다. 당시 회사를 다니고 있던 남편과 엄마가 주중에 같이 있을 수 없고, 나 혼자 아이를 24시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산후도우미 이모님을 3주 오시라하고, 그 분과 마음이 잘 맞아 100일까지 연장하여 계속 출근해서 아이를 봐주셨다. 친정집은 2층 단독주택이고 아이와 나는 거의 2층에서 생활했다. 

이모님 마지막 날, 조금 일찍 퇴근하시라 하고 이모님이 옷 갈아입고 짐을 챙기시는 동안 아이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오려고 했다.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아이를 놓을 의자를 들고 내려오다가 마지막 계단에서 헛발을 디뎌서 굴러 넘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슬로모션 장면 중 한 장면이다. 넘어지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한 손에 들고 있던 아기의자는 집어던지고 두 손으로 아이를 감아서 허공 위로 올렸다. 아이는 바닥에 닿지 않고 무사했으나 발에서 '두둑' 소리와 함께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돌이켜 생각했을 때 만약 내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옆에 난간을 붙잡아서 그 사달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이후로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 나는 잠옷 차림으로 119에 실려 동네 응급실에 갔고, 사진 촬영 결과 발등의 뼈가 부러지고 인대가 끊어졌단다. 수술 여부는 부기가 가라앉아야 알 수 있다고 한다.


병실에 누웠는데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장 아이는 누가 보지? 급한 대로 그 상황을 모두 보시고 퇴근하신 이모님께 기간 연장을 부탁드렸으나, 어떤 산모가 이모님을 지정해서 출근하시도록 다음 주부터 계약이 되어있어서 어렵다고 하셨다. 그동안 우리 아이를 봐주신 이모님이 안된다니. 나도 집에 없는데 얼굴 한 번도 못 본 생판 남한테 출근해서 애를 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을 구한다 한들 엄마도 없는데 24시간 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설상가상으로 나는 그때까지 출산 후 생리나 머리 빠짐이 없었는데 갑자기 큰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생리가 시작되고 머리가 우수수 빠지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왔다.


부기가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주말 동안 어찌어찌 친정식구들과 남편이 아이를 봤다. 문제는 그 이후이지. 우리 집과 친정엄마가 평일에 생활하는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일단 아이와 짐을 모두 우리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2층을 꽉 채운 아이와 내 짐 그리고 커다란 침대까지 남편과 혈육이 열심히 짐을 옮겼다. 짐을 옮긴 날 나도 우리 집으로 옮겨졌다. 내가 119를 타고 간 병원의 소견과 수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어느 정도 부기가 빠졌으니 다른 병원으로 전원 하기 위해서 퇴원을 했다. 여러 의사들의 소견을 들어보고 수술 여부를 결정하고 싶었다. 반 깁스를 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나, 100일 된 아기, 석 달간 생활한 아기와 나의 짐이 정리되지 못한 채 그냥 몽땅 옮겨져서 널브러져 있는 집안. 어느 하나 제정신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일단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기관에 연락을 돌려서 아이를 볼 수 있는 인력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우리 집 지역에 있는 산후도우미 업체에 연락해서 사정을 말하고 당장 출근할 수 있는 분을 구했다. 우리가 집에 도착한 날 그 이모님도 첫 출근을 하셔서 아이를 맡기고 나는 병원에 다시 갔다. 신뢰할 수 있는 의사분을 만났고, 나는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최대한 빨리 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입원 수속을 밟고 입원을 했다. 그리고 이모님 퇴근시간이 되셔서 아이를 맡아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너무 고생하셨다고 조심히 들어가시라고 문자를 남겼고 알겠다며 웃으며 답장이 왔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업체 원장에게 연락이 왔다. 그 이모님이 그만두시겠다고 하셨단다. 본인은 2주 된 신생아만 보다가 100일 된 아기를 보니 너무 무거워서 못하겠다고 하셨단다. RUN!!!!!!!!!!!!!!!!!!!!! 

나는 입원을 했는데, 이모님은 그만두셨다. 하하하하.


그래서 업체 원장에게 내 사정을 말하니 본인이 다시 구해주시겠단다. 그래서 조금 큰 아이도 맡아보신 적이 있는 분이 다시 집에 오셨다. 그다음 날 수술대에 누웠는데 천장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라는 성경구절이 적혀있는 것을 보고 서러운 마음에 꺼이꺼이 울었다. 울면 마취가 잘 안되니 진정하라는 마취과 원장님의 손을 부여잡고 수술에 들어갔다. 이래저래 시간이 지나고 통깁스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은 방마다 턱이 있고 문틈이 작아서 휠체어를 쓸 수 없고, 무엇보다 아이가 막 뒤집기 시작하여 바닥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엉덩이를 질질 끌면서 다녔다. 통깁스하고 두 달, 반깁스 하며 재활치료 두 달. 그 기간 동안 낮은 시선으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며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생활에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그 기간 동안 엄마와 남편의 극적인 희생이 있었다. 아이, 나, 집안일, 생계 이 모든 것을 남편이 떠안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하고 고맙다. 한 가지 더 다행인 것은 내가 사는 빌라 3층에 막내 이모네가 살고 있어서 엄마와 남편이 없을 때는 이모와 친척동생들이 내려와서 아이를 봐주었다. 어차피 부러질 운명이었다면 다리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팔은 자유로워서 아이가 울 때 안고 분유를 먹이는 것은 가능했다. 만약 팔이 부러졌다면 아무도 없는 집에 아이가 엉엉 울 때 나도 같이 엉엉 울었을 것 같다.


내가 완전히 보행을 할 때까지 우리 집에는 참 많은 이모님들을 거쳐갔다. 사설 이모님을 계속 채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금전적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정부에서 운영하는 아이돌보미를 신청했는데, 종일제(지원금이 많이 나오며 한 분이 정기적으로 옴)에 신청했으나 대기가 너무 길어 그전까지는 시간제 선생님을 모셨다. 월화수, 화목, 토, 일. 그분들의 스케줄 상 이렇게밖에 짤 수 없어서 일주일에 네 분이 돌아가면서 집에 왔다. 


그 당시 나의 소원은 내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서 동네를 걷는 것이었다.

깁스를 풀고 재활치료도 끝내서 자유롭게 되었을 때, 아이를 데리고 혼자 나와서 걸으며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나도 드디어 걸을 수 있다 라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했고, 나도 이제 내 몫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감정이 복잡했었다.


나는 다행히 끝이 있는 병이었다. 어렵지만 끝을 내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격하게 몸을 사리게 되었다. 다시 한번 더 주저앉고 싶지 않다.


아이도 아프면 안 된다. 하지만 엄마는 진짜로 아프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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