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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섬 Mar 23. 2016

나에게만 특별한 일

이책이글 2회_이글_복권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가끔은 진짜 투명인간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잘 지내는 것이 나에게는 밀려있는 방학숙제같이 버거운 일이었다. 겨우 몰아서 해치우는 때도 있었지만, 다음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밀리곤 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끼어들 수 없다. 쓸데없이 아는 척, 관심 있는 척하지 않아도 되는 게 인생이다. 가끔 퇴근길에 집 앞에서 마주치는 옆집 아줌마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볼 때도 나는 휴대폰을 보는 척, 통화하는 척하면서 무심히 지나친다. 미안함을 느껴본 적은 없다. 가치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을 뿐이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평온한 내 일상이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 나는 로또 1등에 당첨됐다.


월요일. 마냥 좋았다. 그 당첨금이면 완전히 사라져서 혼자인 삶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 생각만으로도 기뻐서 누구라도 붙잡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러진 않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없었으니까.


화요일.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당첨금은 받기 전까지는 내 돈이 아니다. 그리고 당첨금을 받으려면 은행 본점에 가야 한다. 불안했다. 내가 당첨금 받는 걸 보고 누군가 따라오면 어떡하지?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미행해서 집에 쳐들어와 당첨금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떡하지? 내가 제대로 대꾸나 할 수 있을까?


수요일. 고민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연차를 내고 은행에 갔다. 티 나지 않게 통장을 하나 만들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슬쩍 훑어봤다. 수상해 보이는 덩치 큰 남자, 수상해 보이는 화장 진한 여자, 수상해 보이는 신문 보는 할아버지, 수상해 보이는 꼬마 아이들, 모두가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모두가 모두를 보는 것 같았다. 미리 분위기를 보러 오길 잘했다.


목요일. 아니다. 내가 바보였다. 멍청한 놈. 어제 가서 통장을 만들었으니 그 사람들은 다 나를 봤을 거다. 내가 못 본 사람들도 나를 봤겠지. 그런데 내가 은행에 또 나타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하다. 그 사람들은 매일 은행에 나가 나같이 멍청한 당첨자를 찾고 있을 테니까.


금요일. 오늘을 넘기면 주말을 보내야 한다. 당첨금을 찾으러 가는 것도 불안하지만 당첨된 복권을 계속 가지고 다니는 것도 불안하다. 나는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살고 싶을 뿐인데, 사람들은 도대체 날 가만히 두질 않는다.


토요일. 다음 당첨자가 나왔다. 이제 나에 대한 관심이 좀 사라지려나? 그럴 리가 없겠지. 사람들에게 몇 회차 1등인지는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다. 


일요일. 온종일 집에 있었다. 뭐라도 시켜먹으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음식을 건네받는 순간 갑자기 집 안으로 쳐들어와 복권을 내놓으라며 날 협박할 것만 같다.


월요일. 오늘은 꼭 가야 한다. 회사는 안 나갔다. 한 주 만에 또 연차를 쓰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아예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이제 중요한 일도 아니다.

은행에 도착했다. 미리 준비한 모자와 마스크도 잊지 않았다. 이게 더 눈에 띄는 모습이라는 건 알았지만,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대기표를 뽑는 대신 청원경찰에게 가서 조용히 내가 1등 당첨자라는 걸 알렸다.

경찰은 나를 창구가 아닌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당첨금을 받았다. 직원들이 기계적으로 축하인사를 건넸다. 은행에서 나와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혹시 누가 나를 쳐다보지 않을까 주위를 힐끔거리며 둘러봤지만 나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책이글 팟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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