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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섬 Mar 23. 2016

그날 그때

이책이글 8회_이글_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다시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를 만나면 그녀는 뒷목까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들이마시는 숨에 비해 내뱉는 숨은 얕고 희미해서 미처 나오지 못한 공기들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그녀를 남들보다 가벼운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그녀의 발은 땅에 닿아있지 않아 보였다.


그녀와의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방법을 알았다면 지금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다만 내가 끝을 생각했던 순간은 알고 있다.

그녀를 가장 사랑했던 날이었다.


"좋아해."

겨우 꺼낸 내 말에 그녀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 기대는 가끔씩 웃어주는 그녀의 입꼬리에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나는 내 몫의 희망이 떨어져버릴까봐 입꼬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입꼬리를 올릴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그녀가 말했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그녀가 말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녀가 또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흔들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땅으로 끌어낼까봐 겁을 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미치는 모든 종류의 중력을 거부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녀를 가장 사랑했던 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세상에 애착을 갖게 만들고 싶었지만

사실은 나에게 애정을 갖게 만들고 싶었다는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준비가 될 수 있는 일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사랑하는 것이 없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상태를 그녀는 사랑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고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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