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섬 Jun 15. 2019

나쁘지 않은 하루

이책이글 66회_이글_재회_170501

내 일과는 단순한 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잔다. 회사와 집만 오가는 생활이지만 2년 넘게 반복하다 보니 이제 다른 생활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매일 뉴스에서 쏟아지는 실업률 소식을 보고 있으면 이 정도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실업률을 강조하는 뉴스들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지금 회사에 매여서 일을 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그 정도에 감사하면서 더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와 그제가 같고, 이번 주와 지난주가 같은 생활에도 가끔 색다른 일이 일어난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던 순간부터 평소와 달랐다. 매일 아침 알람이 울릴 때마다 좀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데, 오늘은 이상하게 눈이 번쩍 떠졌다. 평소보다 오래 잔 것도 아닌데 몸이 개운하고 가벼웠다. 주말에 늦잠을 잘 때보다 더 상쾌한 기분이었다.


출근길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10분 일찍 나가도 지각을 하게 만드는 버스의 배차 간격이 오늘따라 짧아진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타지도 못하고 그냥 보내버린 버스 뒤에, 빈 차로 다음 버스가 바로 나타났다. 그 길을 앉아서 간 게 얼마 만인가.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2년이 넘게 지나다니던 길을 눈으로 훑었다. 저런 가게들이 있었나. 새삼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하나도 좋은 아침이 아닐 텐데. 모두가 말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인사들이 머리 위로 날아다녔다. 상쾌했던 기분이 금방 가라앉았다. 아마 '좋은 아침' 탓은 아닐 거다. 그냥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지.


“민 대리, 어제 얘기한 보고서 끝났나?”

“민 대리님, 이 기획서 한번 봐주시겠어요?”

“민 대리님, 작년 상반기 매출 보고서 어디 있는지 아세요?”


오전까지는 다른 날과 똑같은 시간이었다. 어제 퇴근 한 시간 전에 요청한 보고서를 출근하자마자 찾고, 자기가 해도 되는 일을 굳이 같이하려는 사람도 있고, 해당 폴더에 잘 들어있는 자료를 찾아달라고 하고. 정작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오후로 다 미루고 요청이나 부탁을 들어주느라 오전 시간을 다 썼다.


점심은 혼자 먹었다.


오후 3시쯤, 문득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농담처럼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회사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만 있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의지로 일어난 게 아니었다. 나는 그냥, 일어나졌다. 그리고 이 과장님 자리로 걸어갔다. 과장님은 거래처와 통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시 앞에 서서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과장님이 전화를 끊고 다른 곳에 전화를 걸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을 꺼냈다.


“과장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민 대리. 지금 좀 바쁜데 이따가 얘기하면 안 될까? 급한 일이야?”


우리는 다 그렇다. 중요한 일이냐고 묻지 않고, 급한 일이냐고 묻는다. 계속 급한 일만 처리하다가 정작 중요한 일은 시작도 하지 못한다.


“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 알았어. 무슨 일인데?”

“잠깐 회의실에 가서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바쁘니까 웬만하면 그냥 여기서 얘기하지.”

“네...”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그동안 살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오늘부로 그만두겠습니다.”

“잠깐 회의실로 가서 얘기하지.”


과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바쁘신데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 바로 사직서 올리고 자리 정리하겠습니다. 제가 하던 업무는 박 대리가 다 알고 있으니 따로 인수인계는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 책상으로 돌아오는 몇 걸음 안에서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았다. 사직서를 작성하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대충 내용을 채워 넣고 전자결재로 올렸다. 책상에 있는 내 물건들은 박스 하나도 채우지 못했다. 나는 누구와도 인사를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회사를 그만두면 어떤 기분일지 항상 궁금했는데, 의외로 별 감흥이 없었다. 신나지도 않았고 우울하지도 않았다. 다만 오늘이 어제와 다르다는 사실만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음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