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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륜 Oct 07. 2023

생각보다 더 삐걱거리던 친정엄마의 첫 필라테스

'어머님' '할머님'이 아닌, '진희님'의 수업 첫날

내 기억 속 친정엄마는 언제나 날씬했다.

6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 치고는 큰 편이었던 166cm의 키,

50킬로 중반대의 몸무게, 군살 없던 엄마는

내가 중학생 때 입던 반코트를 지금도 가끔 입는다.


내가 임신하고 못 입게 된 원피스를 친정엄마는 60대인 지금도 입을 수 있다니,

항상 엄마의 몸은 내게 어떤 굴욕감을 주었다.


그래서 사실, 첫 수업을 앞두고 친정엄마가 운동복을 갈아입었을 때 속으로 좀 놀랐다.


삐져나온 군살과, 구부정한 어깨,

O자로 휘어버린 다리와 뻣뻣한 허리는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티가 났다.


그래도 친정엄마는 첫 수업을 가는 길이 왠지 신나 보였다.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고, 두 세트씩 산 운동복 중에 좀 더 밝은 색의 옷을 입고는

대망의 첫 발걸음을 떼었다.

첫 수업 전에, 문진표를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문진표? 병원인 줄 알았어 까르르-


병원에서 일하는 엄마는 '문진표'라는 용어에 친근함을 느꼈는지 소녀처럼 웃었다.


엄마가 적어놓은 문진표를 보며 나도 웃었다.

오른쪽을 Rt, 왼쪽을 Lt라고

(대소문자를 정확히 맞춰) 표기하는 건

지금까지도 현역에서 일하는

정형외과 간호사의 습관이리라.


병원에서 일하지만 의료인이 아닌 나는

아주 정직하게 문진표에

 '안 좋은 부위 - 왼쪽 발등, 발바닥'이라고 썼다.


첫 수업인 데다 친정엄마는 고등학교 체력장 이후에 단 한 번도 운동을 하지 않았다 보니,

사실 수업이랄 것도 없었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우리의 평소 자세와 호흡을 체크하는 수준이었다.


필라테스 강사님은 나와 엄마를

 '회원님'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늘 '할머님, 어머님' 혹은 일터에선 '선생님, 간호사님, 과장님'으로 불리던 친정엄마는

갑자기 '진희님'이 됐고,

'진희님'을 한 번도 '진희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는 나는

어쩐지 살짝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진희님'의 자세는 내 예상보다 더 엉망이었다.

간단한 어깨 올리는 동작조차 엉성했고,

폼롤러를 허벅지에 대고 문지르는 동작에서는 금방이라도 앞뒤로 쓰러질 것처럼 휘청댔다.


나는 거울 속의 친정엄마에게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 큰 딸 앞에서 본인이 처음 운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스스로가 어색하고, 낯설고, 민망할 텐데 

가장 가깝고도 때론 지랄 맞은 존재인 딸이 쳐다보고 있다면 얼마나 더 숨고 싶을까-



그런데 친정엄마는 날 보고 있었나 보다.

강사님의 호흡법 설명이 주를 이룬,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운동이라고 보기엔 너무 민망한

 첫 스트레칭 수업이 끝나고 나오자마자,

엄마는 '너는 그래도 꾸준히 운동을 해서 자세가 나오나 보다' 라며 내 자세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느끼기엔 80%가 강사님의 시범과 설명이었는데,

친정엄마는 그것조차도 꽤 개운하고

어깨가 풀리는 것 같다며

이거 꾸준히 하면 진짜 시원하겠는데?라는 기대감도 숨기지 않았다.


 왜 나는 지난 10년 동안 이 좋은걸

 친정엄마랑 할 생각을 안 했을까,

왜 엄마는 운동을 무조건 싫어한다고만 생각했을까,


가을 밤바람 때문인지 마음 한편이 서늘했다.





다음 주부턴 본격적으로 주 2회 수업을 하기로 했다.

과연 친정엄마와 안 싸우고 잘할 수 있을까, 엄마에겐 충분한 재활치료 효과가 있을까,

내 몸매는 과연 수업효과를 볼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을 하며 집에 와보니

남편이 고맙게도 딸을 재워놓았다.


덕분에 금방 휘발될 줄 알았던 첫 수업의 여운이 조금 길게 남아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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