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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상실, 그리고 다시 찾아가는 놀이.

<놀이, 유년기의 예술> 5장~8장을 읽고_

by 사유무대

촘촘하게 기록된 아이들의 말과 움직임이 기록된 <놀이, 유년기의 예술> 책을 보면서 자연스레 어린 시절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직은 스터디를 하면서 사회적인 시각을 갖기보다는 개인의 시선에 머무는 것에 아쉬운 마음이지만, 나름의 값진 과정이었음을 잊지 않고 성장 발판으로 삼겠다.

<놀이의 기억>
노는 게 일이었던, 종일 노느라 분주했던, 너무 많이 놀아 지루하기까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구방위대 후레쉬맨이 되어 악당을 잡고,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옥상에 올라섰던 (쫄병 역할을 더 많이 하긴 했지만), 동물이나 식물, 물건과 자유로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초능력, 어딘가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날들.. “내일 또 놀자!” 했던 날들.
돌이켜보니 책에서 이야기하는 ‘놀이에서의 창조’는 나를 예술가로 키워낸 원천이었구나. 놀이의 가치를 진작 알았더라면 노는 것에 진심인 자신을 더 자랑스럽게 여겼을 텐데, 아니면 몰래 숨어서 놀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놀이의 상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에게 놀이의 상실은 개인의 고유성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고 여겨진다.
두 가지가 떠올랐는데, 하나는 ‘놀이 짝꿍의 상실’,

그다음은 방해된 적 없이 ‘놀이의 상실’을 스스로 자처하였다는 것이다.
일곱 살, 오빠의 죽음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모르고 싶었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떠돌이 생활이 끝나고 엄마 아빠를 내가 독차지할 수 있어서, 장난감 쟁탈전 없이 온통 독차지할 수 있어서, 하기 싫었던 쫄병 역할이 끝났다는 사실에 솔직히 처음에는 편안하고 좋았다.
내 놀이 짝꿍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저지른 적 없지만 감당해야 할 것이 참 많았는데.. 남은 자들의 광기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
그 와중에도 나는 심심함을 느꼈고 놀이를 찾아 나섰지만, 왜인지 죄책감이 들어서 숨어 놀았다.
놀이를 하며 재미를 느끼고 새로운 세상에서 너무나 바쁜 나를 엄마가 알아채면 어쩌지, 미워하면 어쩌지 걱정됐다. 그렇게 놀면서 심장은 두근두근.. 스스로 놀이를 빼앗아갔다.

<다시 찾아가는 놀이>
책을 보니 내가 다시 놀이를 찾아 나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생존이었다.
명분이 없었지만, 홀린 듯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아리실 앞에서 기웃거렸던 용기가 떠오른다.
움직이는 법을 몰라 뚝딱 거렸지만 연습을 통해 느껴지는 몰입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매일 새로운 세상 속으로 나를 보내주었다. 억눌린 몸과 마음을 온전히 자유롭게 하는 무대, 같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투닥투닥 으쌰으쌰, 작품을 완성시키는 보람, 관객을 만나는 모든 경험들이 사춘기를 겪는 나에게 생명력으로 다가왔다.

<놀이를 나누는 사람>
동심을 간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필요한 말만 하고 사는 어른이 되어간다.
처리하는 것이 귀찮아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잘못되는 것이 두려워 안전한 방향을 추구하려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감추고 사느라 바빴던 내 안의 어린이가 자신도 가치가 있다고 외친다.
삶 속에서 놀이성으로 머물며 함께 누려져야 할 동심과 사고의 유연함을 잃어가지 않겠다 다짐한다. 아이들에게 엄마로 예술교육가로 부담을 내려놓고, 몰입의 순간에 함께 존재하겠다.
어린이들의 위대함에 다시 한번 경외를 느꼈으며, 현장에서 마주했던 사람들과의 감사한 인연이 문득 떠올랐다. 각자가 간직해 온 순수한 예술의 세계에 초대될 수 있었음에 영광을 표하고 싶다.



-25년 1월 교육연극연구소 사유무대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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