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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커튼이 열릴 때,

<교육연극으로 길을 여는 미래교육>을 읽고_

by 사유무대

【삶이라는 커튼이 열릴 때,

거긴 온라인이 아니다】

내가 디지털 교육에 대한 우려를 말하자,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야. 미래에 생길 문제는 그때 살아갈 아이들이 해결해 가며 살겠지.”
시대의 부채는 이렇게 생겨난다. 무조건적 낙관주의에서, 그리고 허무주의와 게으름에서.

인간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문제를 온몸으로 맞서며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한다. 이는 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공동 운명이자, 미래 세대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다음 세대는 그 문제를 목숨 걸고 해결해 준 전 세대에게 감사한 마음의 빚을 진다. 이런 마음들이 모여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인류애로 연결된다. 내리사랑을 받은 세대는 어른이 되어 다음 세대의 문제에 기꺼이 머리를 싸맨다. 디지털 세상에서 벌어질 문제는 사실 당장 우리가 머리를 싸매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를 모른 척한다는 것은 마치 부모가 사업에 무리하게 투자하다 진 엄청난 빚을 자식에게 상속하는 꼴과 다르지 않다.

미해결 된 디지털 세계는 미래 세대에게 어떤 빚을 남길 것인가? 예측해 본다. 조금 과격할지 모르지만, 나는 미래에는 어른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법 모양새 있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과 여러 감정의 조율,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라는 복잡한 층위의 경험들이 합쳐져 생겨난다. 이런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자신의 목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주체성, 거친 세상에서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조절력, 그리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랑을 줄 수 있는 공감력’을 가진 어른이 된다. 이것을 무언가 세상을 살아갈 대단한 역량처럼 표현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으로 태어나 당연히 누려야 하는 기쁨(본성)이다. 주체성은 자유의 기쁨, 조절력은 인내의 기쁨, 공감력은 사랑의 기쁨인 것이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는 무언가를 조작하고 시스템화하면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만들 수 있다는 접근 방식에 있다. 하지만 정작 진짜 인재는 한 인간이 자신의 기쁨(호기심)에 진심으로 몰두할 때, 즉 인생을 진심으로 즐기는 것에 시간을 투자할 때 탄생한다. 기쁜 인간이 더 기쁘고자 스스로 움직일 때 가장 큰 생산성을 가질 수 있다. 우린 미래 세대를 위해 그들이 더 자유롭고, 더 인내하며, 더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기쁨에 충실한 인간을 돕는 일에 교육연극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사실 교육연극은 교육이라는 큰 틀 안에 존재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교육 방향 자체가 잘못되는 것을 보며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내가 이 일을 해야 할 목적이 더욱 선명해지는 순간이다. 그동안 교육연극은 예술 교육의 하나, 즐거운 체험 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필요성을 명확히 설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교육연극이 디지털 교육의 극단적 부각으로 인해 예견될 마비된 문제들의 해독제가 될 수도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교육연극이 가진 원시성 때문이다. 여기서 원시성은 미개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기쁨, 즉 표현의 욕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뜻한다.

먹고, 자고 욕구 다음으로 생존과 관련한 강력한 욕구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생각한다. 표현은 그것을 목격할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한다. 즉 같은 공간 안에 인공지능이 아닌 생명(사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표현하고 싶은 것을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순간 살아 있는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충족을 경험한다.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면 세상과 더 깊이 교감하고 싶어지고, 그러한 경험이 증가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세상과 맞닿을 수 있는 자신만의 언어(세계관)를 구축해 간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육연극은 인간 본연의 표현과 소통을 원상복구 할 수 있는 해독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연극 수업이 인간의 감정과 본능적 표현에 대한 포용성이 넓은 장르이자, 그 형태 자체가 무언가를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이라는 또 하나의 교사의 등장으로 두 명의 교사 뒤에 숨어 점점 관객화 되어가는 아이들을 교육연극이라는 무대 위에 살아 있는 존재로 끌어내고 싶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연극이라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되는 리허설을 경험하길 바란다.

Q. 그럼 교육과 시대의 해독제인 교육연극을 어떠한 방식으로 세상에 공유하고 설득해야 하나? (연구, 인력, 정책, 연대,,, 등등 다각도로)




_25년 3월 교육연극연구소 사유무대 권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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