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_39
상담을 하며 가장 많이 울었던 건
돌아가신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다.
정확히 언제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가 우리집에 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살았다.
처음엔 할머니가 계신 게 좋았다. 이따금 할머니 주머니 속 쌈짓돈을 내게 용돈으로 주시기도 하셨고, 할머니가 집에 계시니 친척들이 자주 놀러와 사촌들이랑 자주 만나 노는 것도 즐거웠다.
그런데 그 시절의 할머니와의 추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정상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1이라면 나머지 9는 늘 사건 사고를 일삼는 할머니를 말렸던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치매를 앓으셨다.
그것도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처음엔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자주 무언가를 까먹는 정도랄까. 그러다 점점 어린아이 같아지셨다. 먹는 반찬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싫다며 투정이셨고 엄마가 이따금 사다드리는 옷도 색깔이 마음에 안든다며 입지 않으셨다. 할머니 앞에서 사탕이나 과자를 먹고 있으면 당신도 달라며 내 손에 들린 걸 냉큼 뺏어가기도 하셨다. 이 때까지도 괜찮았다. 나이가 들면 다시 아이로 돌아간다더니 진짜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치매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 증상도 여러가지였다. 많은 날을 과거 속에 사셨다. 이제 갓 시집 온 그 때의 시간으로 돌아간 듯 이야기 하시곤 했다.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것이 굉장히 왜곡되거나 갑자기 없던 일들이 사실이 되어 있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할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동네에서 소문난 절실한 기독교 신자셨다. 집에 있는 소를 팔아 교회에 헌금으로 내시기로 하셨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우리집에 처음 오셨을 당시에도 늘 집 앞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셨다. 그런데 치매를 앓기 시작한 뒤로 염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부처님을 외치시더니 주일마다 교회에 가는 나를 두 팔을 걷어부치시며 말리셨다. 나를 교회로 전도한 것이 할머니였음에도 말이다.
그 때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그런 할머니의 행동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렇게 3,4년이 흘렀을까, 할머니는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다며 그 정체모를 존재와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나누셨다. 처음엔 할머니가 헛말을 하는 줄 알았다. 갑자기 ‘저리가!’ 라고 하기도 하고, ‘오지마!’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경지에 이르셨던 건지 ‘네~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와 같이 너무나도 일상적인 대화를 혼자 나누셨다. 지금 돌아켜보면 치매의 한 증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려니 넘길 수 있겠지만 고작 10살 남짓이었던 내겐 괜찮은 척 하려해도 순간순간 겁이 나는 무서운 모습이었다.
할머니의 증상이 이제 막 심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부모님이 식당을 시작하셨다. 그 전까지는 엄마가 집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하면 엄마가 달래주기도 하고 또 엄마가 있을 땐 할머니의 증상이 자주 드러나지 않기도 했기에 나름 견딜만 했다. 그런데 식당일이라는 게 새벽 일찍 준비하러 나가고 일이 끝나면 밤 열시는 넘어야 집에 들어올 수 있기에 집에는 늘 나와 할머니 둘 뿐이었다.
그 당시 할머니를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할머니가 보인다는 그 무언가는 ‘저승사자’였다. 그런데 그 저승사자가 데리고 가려는 사람이 아빠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나는 거실에 할머니는 할머니 방에 앉아 같이 티비를 보고 있다가 해가 질 즈음이면 불현듯 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통곡을 하셨다.
‘어떡하노 어떡하노 지금 너희 아빠 관이 여기로 들어오고 있단다!’
‘아이고 우리 아들 우짜노’
‘얼른 나가봐라 얼른! 아니다 아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온 몸을 부르부르 떨고 나를 두드리며 소리쳐 우셨다. 아빠가 죽었다고. 저승사자가 데리고 가버렸다고. 이제 어떻게 하냐고.
할머니에게 정신차리시라고 몇번이고 이야기를 하고 아니라고 아빠 괜찮다고 말해봐도 먹히지 않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당연히 그럴일이 없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매번 진짜인 것만 같은 할머니의 행동에 무서워서 가게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곤 했다. 그마저도 바쁜시간이라 전화가 되지 않을 때면 나도 모르는 불안감에 몸을 웅크리고 할머니가 괜찮아지시길 기다렸다.
내가 반응을 하지 않자 할머니는 온 집안을 돌아다니시며 문을 걸어 잠그셨다. 현관문이며 방문, 모든 창문까지. 우리까지 위험하다며 꼭꼭 문을 잠그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혼자 자취를 할 때에도 지금도 잠 자기 전 꼭 문단속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 모르게 불안했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가 했던 상상의 장면이 떠올랐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상담을 통해 많이 나아지고 있다.)
할머니의 병적 상상은 곧 할머니에겐 현실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일을 가시고 나와 오빠가 학교에 있는 시간이면 집을 나와 바다로 가셨다. 물에 빠지려는 할머니를 동네 분들이 몇번이고 구해주셨다. 바다 앞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그 때마다 불려나가 할머니를 모시고 집에 가야했다.
한 번은 할머니가 학교로 찾아오신 적도 있다. 아빠가 죽어서 집에 가봐야한다며 무작정 교무실에 찾아와 나를 얼른 데려가야한다고 하셨다. 얼마나 창피하고 싫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작은 동네였기에 우리집 사정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어서 선생님께서 잘 처리해주셨다.
몇 번의 큰 소동을 치르고 난 뒤 우리집 현관문엔 좌물쇠가 걸렸다. 누군가 집에 없을 때에는 그 좌물쇠가 할머니를 막아줬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늦게 들어오시는 부모님과 고등학생이던 오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할머니의 좌물쇠 역할이 되었다. 그 땐 어쩔 수 없어 했던 일이지만 상담을 하며 돌이켜 보니 어린 내겐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다. 할머니가 아프셔서 그런 것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엔 나는 너무 어렸고 할머니의 증상은 너무나도 심했다.
그런데 그 증상이 정말 억울하리만큼 아빠가 집에 돌아오시면 괜찮아졌다. 오빠가 있을 때에도 덜했다. 꼭 나와 둘이 있을 때면 그렇게 심해지셨다. 어린 마음에 흥분되어 날뛰는 할머니와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도 했다. 도저히 말려지지 않아 할머니를 방에 가둬보기도 하고 그러면 안되지만 제발 이제 그만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다.
도저히 할머니를 모시며 가게일을 병행할 수 없었던 부모님이 가게를 그만두시고 엄마가 집에서 할머니를 돌보셨다. 그렇게 7년을 버텼다. 정말 버텼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표현이 없다. 할머니도 나이가 드시고 기력이 쇠해지셔서 더 이상 집 밖을 뛰쳐나가시지도 그 때처럼 소리치며 소동을 부리시지도 못해질 때까지 긴 시간을 참았다. 나도 나이가 들어 이제 두려움보다는 받아들임이 쉬워졌고 집에 있는 시간보다는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할머니가 자식들이 보고싶다며 고모 삼촌들을 다 불러모으셨다. 누가 누군지 잘 알아보시지는 못하셨지만 다 함께 식사를 했다. 그 다음날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염주를 외우시던 할머니가 화장실에 가시다가 쓰러지셨고,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너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불쌍한 우리엄마. 할머니 수발 드느라 마음편히 친구 한 번 만나러 가보지도 못하고, 나중에는 할머니 똥 오줌도 다 받아내는 모습을 봐야했을 땐 정말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은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운 건 다름아닌 나와 엄마였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애증의 눈물이었나.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지금은 치매라는 질병이 국가적 지원을 받을만큼 잘 알려져 있고 그 치료 기관이나 방법이 잘 마련되어 있지만 그 시절엔 ‘치매’라는 병명은 있었지만 그저 나이가 들면 정신이 조금 약해지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증상들은 더욱더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우리 가족 모두 잘 모르는 일들을, 처음 겪는 일들을 병원의 도움없이 오롯이 우리 가족이서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그 때는 몰랐지만, 나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 갓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었을 나를 돌보기 보다는 할머니를 돌보는 게 우선이 되었고 부모님의 관심 역시 할머니만으로도 버거웠다보니 나에게까지 전달되기 어려웠다. 그렇게 할머니와의 사이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제대로 풀어지지 못한 채 계속 내 깊은 저 내면 속에 쌓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담했던 많은 날들 중에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날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의 나를 위로 해줬던 것. 마음껏 무섭다 울지 못했던 어린 나를 대신에 힘껏 울어보았던 것.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내 안에 있는 할머니에 대한 연민과 분노 그 모든 감정들을 꺼내어 풀어놨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꺼내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 일들을, 혹은 마치 아무일도 아닌 일이었던 것 마냥 누군가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웃으며 해왔던 날들을 다시 직면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 일들이 내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계속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말 너무 아픈 그 기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마주하다 보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해방감을 느꼈다. 그 수많은 밤 문고리를 걸어잠그던 아이에게 걱정마라며 괜찮다고 문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오늘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이제 내게 남은 할머니의 대한 감정은 연민과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머니 그 때 그 집에 할머니 혼자가 아니라 나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었지요? 라고 말해주고 싶을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