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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뗄라 Mar 01. 2019

#1 무용계와 흑인 인종 차별

#1 미국 발레에서의 흑인 무용수에 대한 인종차별 연구

퇴사를 준비하는 무용과 출신 마케터,
그리고 내 마음대로 끄적이는 문화예술과 무용.   


무용계와 흑인 인종 차별

   21세기를 맞이하는 오늘 날 미국사회에는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등 많은 흑인 유명 인사(人士)가 등장하고 있다. 이에 미국 내의 ‘흑인’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이민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 다양한 종족 및 인종집단이 얽혀져 있다. 더불어, 모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 자유 민주주의 사회 체제를 세운 국가이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특정 계층에게는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지 않았다. 노예의 신분을 가졌던 미국 내 흑인들은 1896년, 학교·식당·극장·화장실·버스 등 공공장소 및 시설을 백인과 분리되어 이용하는 것을 인정한 법률인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이 제정을 통해 “흑인은 공공시설에서 분리하되 백인과 평등하면 된다”는 합법성 인정받았다(벤자민콸스, 2002). 결국, 이러한 흑백분리의 부정적인 영향은 오직 흑인만이 떠안게 되었다. 다시 말해, 흑인들은 ‘인종차별정책’과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겪었다. 이렇게 흑인들은 노예 신분을 탈피하지 못한 채, 검은 피부색과 ‘열등함·추함·비정상·악’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 속에서 정체성을 박탈당하며 백인의 시선 아래 타자화 되어왔다(김경남, 1997).


   수 세기동안 최소한의 인간성도 박탈당한 채 동물과 같은 취급을 당하며 노예로 살아야 했던 역사는 흑인들로 하여금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후 법적으로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지속적인 인종차별주의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미국의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실제로, 남북 전쟁 이후 흑인 분장을 한 백인이 다양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묘사하는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를 통해 백인들이 흑인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흑인들은 노예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을 단순히 짐승 같은 모습으로 무대에 비추는 일은 백인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느끼게 하는 사회학적 목적에 부합하였다(로버트 M, 1996).


   이는 예술계에서 흑인을 암묵적으로 배제하는 기제로 활용되었으며, 더욱 냉정하고 혹독하게 그들을 대했다. 다행히 1950년대 이후부터 연극, 영화, 음악 그리고 스포츠 분야에서만큼은 흑인들의 특색을 인정하고 칭송하는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예술계에서는 그 누가 아무리 유능할지라도 흑인이라면 추앙받는 일은 드물었다. 미국에서의 흑인 예술가들은 차별대우, 예술적 인종차별과 문화적 착취, 정치적 압박에 대응해야만 했다. 따라서 흑인무용수들은 평등한 기회를 얻고자 노력했으며, 현 시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흑인 무용수의 ‘지위향상’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 미국 내 흑인 무용수는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종적·문화적 한계 가운데 새로운 인식의 확대를 저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흑인 무용수의 지위 향상을 위해 많은 흑인 무용수들은 부단히 노력해올 수밖에 없었다. 실상 민주의 꽃이라 불리는 21세기인 오늘 날까지도 무용계 내 흑인과 백인의 수를 비교하여 볼 때, 백인무용수에 비해 흑인무용수의 입지가 상당히 위축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미국사회 내에서 끊이지 않고 존재하는 백인 중심적 사고의 발로라 볼 수 있다(김경남, 1997).


   그러나 흑인들은 미국의 전체 예술·문화 중 문학, 음악 등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 따라 그들의 문화적 요소를 조명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흑인들은 음악, 문학, 시각예술 등의 분야에서 독특한 공헌의 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벤자민콸스, 2002). 대부분의 흑인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어려웠던 상황이었음에도 아이러니하게 그들의 문화적 업적은 미국이 서구문명에 기여한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가 되었다. 흑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 할렘에서 문예부흥운동 할렘 르네상스(New Negro Renaissance)를 주도하며, 이를 중심으로 흑인인종차별에 대한 각성과 독립자존의 열망을 문화적으로 발산했다(한지희, 2016). 특히, 노예시절의 경험을 쓴 자서전적 이야기와 재즈음악, 블루스는 고유한 흑인의 산물을 뛰어넘어 훗날 또 다른 미국의 문화가 되었다. 이렇게 흑인의 문화는 보편화되었고, 인종적으로 한정되기보다는 국민적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무용계 내에서도 흑인인종차별에 대한 반발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기 시작했다. 가장 잘 알려진 단체인 앨빈 에일리 미국 무용단(Avin Ailey American Dance Theatre, 이하 AAADT)은 1950년대부터 활약한 다인종무용단으로써, 흑인들의 삶을 작품 속에 융화시키며 흑인 무용수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흑인영가, 노동요, 블루스 등의 흑인음악을 사용하며 인종주의적 편견 속에서 자생력을 키워가면서 흑인 무용수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다(김경남, 1997). 또한, 발레에서는 아서 미첼(Arthur Mitchell)의 할렘무용단(Dance Theatre of Harlem, 이하 DTH)과 할렘예술무용학교(Harlem School of Art)가 있다. 오직 흑인들로만 구성된 할렘무용단은 발레계 내에서 흑인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당시는 흑인들이 아무리 발레 기교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신체 이미지 때문에 째즈나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김말복, 2003). 이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흑인인종차별에 대해 반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1950년대를 기점으로 흑인무용수들의 노력을 현재 다시 재조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흑인무용수들의 지위가 드라마틱하게 향상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백인 중심의 보수적인 뿌리가 깊게 박힌 미국 아메리칸 발레 씨어터(American Ballet Theatre, 이하 ABT)는 2015년 7월 최초로 흑인 수석 발레리나를 등용했다. ABT는 1940년 창단 이후 75년 동안 흑인무용수가 단 9명밖에 되지 않은 단체이다. 이에 흑인인종차별을 딛고 수석 무용수로 등용된 미스티 코플랜드(Misty Copeland)는 전 세계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코플랜드는 같은 해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15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오를 정도로 새로운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세계는 그녀를 인종, 나이, 신체적 조건 등 온갖 편견을 이겨낸 무용수라 칭송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여러 흑인 무용수들의 노고가 녹아져 있다.



- 2014. 02월 학부 논문 中 발췌

[미국 발레에서의 흑인 무용수에 대한 인종차별 연구 - Arthur Michell과 Janet Collins를 중심으로-]


* 필자의 학부 졸업 논문입니다.

* 흑인 무용수 차별에 관한 이야기는 총 5부작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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