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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두세술 Jan 31. 2017

러덜리스(Rudderless)

영화 리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스, 어거스트 러쉬, 비긴 어게인, 위플래쉬, 싱 스트리트. 음악영화라면 생각나는 이러한 영화들.


순진하게도 나는, 영화의 중반까지는 이런 음악영화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덜리스는 평범한 음악영화처럼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 사랑을 나누거나 역경을 헤쳐나가거나 꿈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혼란스러웠고, 영화가 끝나자 먹먹함이 찾아왔다.


샘의 아들 조쉬  <출처 - 영화 러덜리스>
"옳지 않아. 옳지 않지만 내 아들이잖아"

영화를 보는 동안 '그래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번갈아가며 혼란스럽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조쉬는 '그래도' 총기난사로 6명을 죽인 살인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의 아들이다. 절대 사랑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판단도, 어떤 감정도 명확히 결정지을 수 없게 만든다.

<출처 - 영화 러덜리스>

이러한 잔인한 설정으로 인해, 영화 중반의 반전은 그저 극적 요소가 아닌 필수적 장치였을 것이다. 대부분 반전을 위한 영화들이 관객에게 충격적 반전을 안겨주고 끝나는 데에 반해, 러덜리스의 반전은 영화 중반 관객에게 '이거 몰랐어?'라고 말하듯 스리슬쩍 등장한다. 감독은 단지 극적 요소 때문이 아니라 관객이 샘과 감정을 동일시할 수 있도록 장면의 때를 기다린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조쉬가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보여줬다면, 관객은 '살인자'와 '아들'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몰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잔인하게도 영화는 관객들이 오로지 '자식을 잃은 부모'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조쉬의 정체를 밝힌다. 그제야 정체를 밝힌다 한들, 누가 쉽게 조쉬를 오로지 살인자로 바라보고 그의 음악을 살인자의 음악으로만 볼 수 있겠는가. 그저 샘과 함께 혼란스러운 아픔을 느낄 수밖에.

잊을 수 없는 4분 35초의 엔딩  <출처 - 영화 러덜리스>

영화를 보며 윤리라는 기둥 뒤에 숨어버리려 했지만, 영화는 숨어봤자 소용 없는 거울의 방에 나를 밀어 넣은 듯했다. 내가 가진 윤리적 가치관으로, 또는 평소와 같은 살인자에 대한 시선으로 조쉬를 경멸하고 싶었지만 사랑이란 감정의 몰입 앞에서 이성은 생각보다 힘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은 그런 혼란마저 그저 잠재워 둘 만큼 먹먹했다. "나의 아들"이란 가사를 계속해서 읊는 살인자의 아버지. 그의 노래 끝에 남겨진 마이크마저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 지울 수 없는 여운을 더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싶을 때, 먹먹한 여운이 남는 영화를 보고 싶을 때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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