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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두세술 Feb 10. 2017

어머니란 존재의 이유

<동경 이야기>

<출처 - 네이버 영화>


  카메라 움직임이 유일하게 허락되다

 동경 이야기는 짧지 않은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136분의 러닝 타임 중 단 한 장면, 유일하게 카메라 움직임이 등장한 그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해당 장면은 노부부가 아타미에서 돌아와 각자의 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딸의 집에서 쫓겨나듯 나와, 영화 내내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노부부가 각자 묵을 곳을 찾아 헤어져야 하는 상황은 그들의 쓸쓸함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카메라는 오른쪽으로 트래킹하여 움직이고 있다.  <출처 - 영화 동경 이야기>


 이 장면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두 번 등장하는데, 첫 번째 움직임은 카메라가 벽을 따라 트래킹하며 앉아있는 노부부의 뒷모습에 다가가는 부분이다. 벽을 이용하여 천천히 장면이 전환되자 그 시선에 따라 나 역시 달라진 공기를 천천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등장한 부채와 부채 없이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바람, 더불어 모기향과 선풍기의 등장으로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의 계절감을 느껴왔다. 그러나 장면이 전환되며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벽에 비쳤고 이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영화 내내 등장했던 부채 역시 지금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등장하지 않았다. 이 장면에선 영화 내내 느껴졌던 찌는 듯한 더위가 아닌, 시원하지만 무언가 휑하게 뚫려있는 듯한 낯선 공기가 느껴졌다.        


 공기의 변화

 만약 이 장면에서 어김없이 부채가 등장하고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또는 정지된 카메라로 인해 공기의 변화를 관객이 알아차리기 어려웠다면 관객들은 영화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 그로 인해 느낄 수 있는 바람, 부채의 부재가 합쳐지면서 관객은 무언가가 변화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공기의 변화로 인해 우에노 공원이 단순히 다른 공간이 아니라 다른 차원, 다른 세계로 변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장면이 다른 세계로 느껴졌던 이유는 공기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노부부가 동경을 바라볼 때 슈키시는 마치 먼 과거 또는 미래에 존재하는 사람(토미)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즉, 토미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 장면에서 살아있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토미에게서 그런 기운이 느껴진 이유는 카메라가 토미의 얼굴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장면에서 슈키시는 최소한 그의 옆모습이라도 보여주는 것에 반해, 토미는 대화 중 고개를 돌려도 카메라에 얼굴을 전혀 비추지 못한다. 목소리는 들리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는 촬영으로 인해, 토미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슈키시와 토미의 대화 장면, 토미의 얼굴은 볼 수 없다. <출처 - 영화 동경 이야기>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전한 공기의 변화로 인해 다른 세계로 느껴졌던 우에노 공원. 그리고 그 우에노 공원을 벗어날 때(동경을 바라볼 때) 느껴졌던 현실과 어색한 토미의 존재. 이들로 인해 내가 느낀 것은 토미가 우에노 공원에서 '처음으로 죽었다' 또는 '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우산

 우에노 공원에서 토미가 죽기 시작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존재한다. 이는 노부부가 항상 들고 다니던 '우산'을 통해 설명하고 싶다. 이 우산은 노부부가 동경에 왔을 때 처음 등장하여 여행 내내 노부부를 따라다닌다. 우산은 초반까진 손에 들린 사물 정도로만 등장했으나, 공원 장면부터는 마치 꼭 봐달라는 것처럼 조명된다. 오즈는 왜 굳이 해가 쨍쨍한 동경에서 노부부에게 우산을 쥐여줬을까? 그리고 왜 어머니가 우산을 잊는 장면을 두 차례나 넣어 우산을 조명했을까?

잊은 우산을 다시 챙기는 토미  <출처 - 영화 동경 이야기>

 

 우산은 비가 오지 않는 동경에서 쓸모없는 존재지만,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버리지 못하는 존재다. 이 우산은 마치 노부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부부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존재가치'라고 보여진다.


 우산은 동경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땐 우산을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그 등장이 미비하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노부부는 자신들이 자식들에게 쓸모없는 존재, 또는 귀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은 채(또는 미뤄둔 채) 자식들을 만날 기대로 부풀어 있다. 그러나 노부부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 그들은 처음부터 자식들에게 '쓸모없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마치 아직 눈에 띄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쓸모없는 존재였던 우산과 같아 보인다.

 

 이 우산의 두 번째 등장은 바쁜 자식들 대신 노리코가 동경을 여행시켜줄 때인데, 이때는 노부부가 자신들의 존재(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관객은 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쓸모없는' 우산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노부부가 본인들의 '쓸모없는 존재'를 인식할수록, 우산도 본인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도식화에 빠진 듯도 했지만, 우산이 노부부의 존재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오즈가 단순히 우산과 노부부를 동일시하여 표현했다기보단, '쓸모없는 우산'이란 사물의 감정이 주는 힘을 이용해 노부부의 감정을 극대화시킨 것 아닐까, 생각된다.

 

계속되는 우산의 등장   <출처 - 동경 이야기>

 이 우산의 다음 등장은 바로 글의 처음에 언급한 장면인데, 이때는 딸 시게가 노부부의 '쓸모없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그들이 자식의 집에서 쫓겨나듯 떠나온 장면이다. 그리고 노부부가 본인들의 '쓸모없음'을 확실히 인식한 것처럼, 우산도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어머니 토미는 우산을 처음으로 잊어버리는데, 나에겐 이 장면이 '이제 그만 인정하라'며 토미의 존재 의미를 버리는 영화의 잔인한 선택으로 보였다.


 우에노 공원은 오즈가 유일하게 카메라의 움직임을 허락한 곳이며, 이 카메라의 움직임은 오즈의 큰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는 오즈의 선택들이 만들어낸 이 장면에서 토미의 존재, 더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의 존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자신의 존재를 오직 '어머니'에서 밖에 찾을 수 없었던 토미가 답답하기도 했지만,  우리들의 어머니도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는 순간은 결국 자식들이 그들을 필요로 할 때가 아닐까.

인서트 장면  <출처 - 영화 동경 이야기>

 영화의 끝자락, 한 인서트 장면에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걷고 있는 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손에는 펼쳐져있는 양산이 들려있다. 영화 내내 펼쳐지지 못했던 그것이 펼쳐져서 자신의 쓰임을 다하고 있던 것이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엄마'를 수없이 찾을 그때, 어머니의 존재가 가장 빛을 발하는 그때의 어머니였기 때문일까. 노부부의 그것이 양산이었으면 좋았을 걸. 아니, 우산을 양산으로라도 이용했으면 좋았을 걸. 자신의 존재를 오직 '어머니'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던 토미가 더욱 안쓰러웠다.


 자식들이 필요로 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어머니라는 존재. 언제나 자식들을 돌보고 챙겨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들은 언젠가 자식들의 돌봄을 받는 존재가 되곤 한다. 자식들이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심지어 자신이 짐으로 여기지는 때가 올 때, 본인의 존재 의미까지 상실할 수 있는 것이 '어머니'라는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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