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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두세술 Oct 28. 2017

진정한 '소통'을 찾아서

김씨표류기

  영화에는 표류하는 두 김씨가 등장한다. 남자 김씨는 자살시도에 실패해 한강 밤섬에 고립되고, 여자 김씨는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한 ‘히키코모리’이다. <김씨 표류기>는 혼자가 된 이 두 남녀가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민방위 훈련이 시작되자 커튼을 열어 젖힌다.

  그녀는 낮에는 커튼을 열지 않을 만큼 소심하며 헬멧을 쓰고 커튼을 열만큼 한껏 긴장했지만, 커튼만큼은 시원하게 열어젖힌다. 그리고 그 커튼이 열렸을 때 들어오는 햇빛과 그녀가 시원하게 뻗은 팔, 창문까지 여는 행동으로 인해 그녀의 방에서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쓰레기가 가득 찬 공간에서 시원함이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그만큼 장면의 공기와 빛이 주는 힘은 강렬했다. 시원하게 커튼과 창문을 열어젖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녀도 빛과 바람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와 동시에 그 공기와 빛을 모두 차단한 채 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가 기피하는 것은 빛과 바깥공기가 아니라 사람, 정확히는 ‘사람의 시선’인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인간이 기본적으로 느끼며 살아야 할 빛과 바람 그리고 다른 것들 모두를 차단한 채 살고 있다.

그녀는 항상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사진1)

  그녀가 세상을 바라볼 때, 장면은 위와 같은 카메라 화면으로 바뀐다. 그녀가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관객에게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직사각형 틀의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이 익숙한 직사각형 세상이 카메라 화면이란 것을 인식시키면, 그와 동시에 관객은 화면의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같은 직사각형의 세상이지만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좁아진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영화는 관객에게 그녀가 살고 있는 답답한 세상을 체험하게 한다.

(사진2)

  위 사진은 그녀가 카메라에 눈을 대자 보이는 장면이다. 그녀가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자, 사이렌 소리가 그치고 평화로운 BGM과 함께 ‘일 년에 딱 20분. 이 순간만큼은 세상은 아무도 없는 달과 같습니다.’라는 그녀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녀는 모든 움직임이 멈춘 세상(사진1)을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세상(사진2)으로 바라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라진 이 장면은 마치 환상적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이것은 그녀의 바람일 것이다. 서울의 바쁜 움직임, 많은 사람들, 그들의 시선이 모두 사라진 세상이 그녀에게 가장 편안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기분이 달의 중력처럼 1/6로 가벼워집니다. 세상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습니다.’의 내레이션과 함께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떠오른다. 노란빛의 따스한 햇빛,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부드럽게 휘날리는 머리카락, 둥둥 떠오르는 몸, 평화로운 BGM이 함께하는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판타지적인 장면이다. 이어서 ‘세상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습니다. 1/6만큼 가볍게 살 수 있게.’라는 내레이션을 통해, 그녀의 행복하고 평온한 상태를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장면은 빛, 공기, 음악, 인물의 행동 모두가 평온한 상태이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사람의 부재로부터 온다. 그녀에게 아무도 없는 세상은 자신을 바라볼 사람, 평가할 사람, 비판할 사람의 부재이다. 그녀에겐 ‘소통에 대한 부재’가 주는 무서움보다 ‘소통의 두려움에 대한 부재’가 주는 평온함이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 세상 속에 사는 여자 김씨

   그녀는 ‘미니홈피’에서 다른 사람의 옷, 가방, 신발, 심지어 얼굴까지 가져와 자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현실 세상과 달리, 사이버 세상에는 그녀를 동경하는 사람들,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그녀는 오직 사이버 세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는 두 시계가 등장한다. 왼쪽 사진은 벽에 걸린 아날로그 시계이며, 오른쪽 사진은 그녀가 사용하는 컴퓨터 시계이다. 그녀가 굳이 컴퓨터의 시계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영화의 벽시계를 관찰해 보았는데, 벽시계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멈춰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현실이 아닌 사이버 세상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녀에게 현실은 중요하지 않은(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과 달리 아날로그는 전기가 켜져 있든 껴져 있든지 상관없는, 계속적인 변화와 흐름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날로그가 작동하지 않은 채, 디지털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녀의 삶이 컴퓨터가 켜졌을 때 시작되며 꺼졌을 때 끝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매일같이 여는 커튼과 창문이 그녀에겐 일 년에 두 번 있는 ‘굉장한 일’이다. 그녀는 학창시절 얼굴의 흉터 때문에 왕따를 당하였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방 안에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집은 서울의 수많은 집 중 하나일 뿐이며 누구도 그녀의 방을, 그 방에 사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하였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의 생존에 행복해하며, 사이버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사람과의 소통을 원하고 있다. 그녀가 두려운 것은 단지 그 소통 속 간섭과 비난의 시선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외모와 행동에 ‘간섭’하고 ‘비난’하며, 정작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관심’ 갖지 않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장면에 나오는 사이버 세상의 미니홈피에서도 영화의 시선이 드러난다. 그녀가 사용하는 미니홈피는 SNS(Social Network Service),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이다. 그러나 장면 속 미니홈피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녀는 SNS를 통해 거짓된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속에서 거짓된 정체성을 확립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현실 사회와 더욱 멀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소통을 위해 등장한 서비스가 새로운 종류의 ‘소통의 부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서울, 그중에서도 서울을 상징하는 ‘63빌딩이 보이는 한강’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은 사람이 가장 많은 도시이자 현대화를 상징하는 도시이다. 이 도시 속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바쁜 삶에 치여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사회는 더욱 빨리 움직이라며 재촉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시간은 부족해지고 있다. 스마트폰, SNS, 모바일 메신저 등 다양한 소통의 방식이 탄생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소통은 줄어들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가장 많은 도시에서 소통의 부재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현대사회의 진정한 소통의 부재를 비판하며, 소통을 가장한 ‘관심’과 ‘비난’이 아닌 진정한 ‘소통’과 ‘관심’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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