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소통은 눈부셨다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읽고

by 춘프카

미국의 어느 한 도시에 가난한 여성 작가가 있었다. 이름은 헬렌 한프. 한프는 희곡 작가로 시작하여 방송 대본, 잡지 기사, 백과사전 항목, 어린이 역사책 등 닥치는 대로 글을 썼으나 단 한 편의 희곡도 무대에 올리지 못했고 어느 모로 보나 성공한 작가는 아니었다. 중년이 끝날 무렵 어느 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가 절망에 빠졌다. 그녀는 읊조렸다.


“나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로 그다음 날, 영국의 고서점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가난했던 그녀가 서적을 구하기 위해 20년간 왕래했던 곳이었다. 신음을 멈추고 그동안 도서 구매자인 자신과 서점 직원이 주고받은 편지를 챙겨 출판사로 향하는 데, 이것이 전환점이 된다. 방방곡곡에서 편지, 전화, 선물이 날아드는 유명 작가가 되었고, 직접 쓴 희곡은 아니지만 그녀와 서점 직원 간의 이야기가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등 다양한 매체로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계속 공연되고 있다. 내가 펼쳐 든 책 <채링크로스 84번지>의 탄생 배경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1949년에서 1969년, 20년 간 한 도서 구매자와 서점 직원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다. 말하자면 도서 주문서와 청구서라는 상업적 문서였던 셈이다. 구하기 힘든 것, 희귀한 것을 구하는 자의 절실함과 그 절실함을 이해하는 자의 성실함이, 까다롭고 저돌적이면서도 정 넘치는 가난한 작가와 점잖고 진지하면서도 보일락 말락 한 여유를 보여주는 서점 직원의 목소리. 그들의 편지는 매력적이고 따뜻했다.


처음 이 책을 소개받은 것은 2012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읽고 쓰는 것을 귀하게 여기던 그 친구의 표정이 유독 반짝거렸다. “어젯밤에 다 읽었어.”라며 독서 감상평을 말하는 데, 끝나기도 무섭게 나는 곧장 서점으로 향했다. 읽으면서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전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겨보았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또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헬렌(1951년 4월 16일 편지)


p.18 새비지 랜더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책을 잡자 곧바로 로마 대화편 부분이 펼쳐지더군요. 두 도시가 전쟁으로 파괴되고, 고통받는 백성들이 지나가는 로마 병사들을 붙들고 부디 자기네를 밟고 지나가 이 고통을 끝내 달라고 애원하는 대목이었어요. 걱정할 인은 기근밖에 없는 이솝과 로도피스의 대화편으로 넘어가니 안도감마저 들었습니다.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무릎을 쳤다. ‘나도 저런 적이 있는데’하면서. 내게 너무나도 엄했던 문학 평론가 선생님께서 “아니, <토지>도 읽어 본 적 없으면서 무슨 글쓰기에 관심이 있단 말이냐?”라고 호통을 치셨다. 긴장한 나는 발품을 팔아 이곳저곳을 다니며 토지 전편을 찾고자 헤매곤 했다(선생님께서는 <토지> 초판을 매우 강조하셨기에, 더 어려웠다). 어렵사리 구하게 되었는데, 1권의 첫 장을 펼쳐보니, 짧은 편지가 있었다.


사랑하는 숙이에게 / 스무 살의 생일을 축하하며 / 아빠가.


딸의 스무 살 생일 때 <토지>를 선물하는 아빠. 참 멋지다. 나도 왠지 숙이가 되는 듯했다. 괜히 읽기도 전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반듯한 새 책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헌책의 매력. 그 오롯한 추억을 헬렌의 편지가 되살려줬다. 또한, 바쁜 업무로 신청했던 서적에 대한 소식이 없자, 앨랜은 분노의 편지를 붙인다.


p.22 프랭크 도엘 씨,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우두커니 앉아 빈둥거리고 있나요? 리 헌트는 어디 있어요? 옥스퍼드 운문은요? 불가타 성서와 귀여운 바보 존 헨리는 또 어디 있고요?
이 책들이 사순절 독서로는 그만일 거라고 생했는데, 아무것도 보내주지 않는군요. 덕분에 저는 여기 앉아 제 것도 아닌 도서관 책 귀퉁이에다가 깨알같이 글이나 끼적거리고 있어요.
언젠가는 사람들이 그게 제가 한 짓이란 것을 알아내고는 제 도서관 출입을 빼앗아 갈 거예요. 제가 부활절 토끼에게 당신한테 달걀을 갖다 주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토끼 군이 거기 도착하면 무기력증으로 죽어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되는 건가요?
봄날도 다가오고 해서 연애시집 한 권을 주문합니다. 키츠나 셸리는 사양이고요.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으로 부탁드려요. 와이엇이나 존슨 같은 시인으로 당신이 직접 판단해주었으면 해요. 그냥 아담한 책이면 되겠는데, 이왕이면 바지 주머니에 꽂고 센트럴파크로 산책 나갈 만큼 작은 책이면 더 좋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멍하니 앉아 있지만 말고, 뭔가를 좀 찾아보라고요!
그 서점이 어떻게 계속 돌아가는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군요.


프랭크의 편지를 서점 직원 모두가 공유했던 것 같다. 여러 명의 서점 직원 중 한 명의 편지와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이 인상적이다.


p. 25 친애하는 한프 양
프랭크한테는 제가 이 편지를 썼다는 것을 모르게 해주세요. 청구서를 보낼 때마다 쪽지 하나 끼워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프랭크가 그런 건 품위 있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못했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프랭크가 꽉 막힌 사람같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꽤 괜찮고, 아니 정말로 아주 괜찮은 사람이죠.
다만, 당신 편지나 소포가 자기 앞으로 오기 때문에 당신에게 편지하는 일은 자기만의 몫이라고 여기는 건 있어요. 하지만 저도 꼭 한 번 직접 편지를 드리고 싶었어요. 저희는 모두 당신 편지를 좋아하고, 어떻게 생긴 분인지 상상해보곤 해요. 저는 당신이 젊고 아주 세련되고 총명할 거라고 생각해요. 마틴 씨는 당신이 멋진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지만 좀 학구적으로 생겼을 거라고 그래요.
사진 한 장 보내주시지 않겠어요? 한 장 있었으면 좋겠어요. 프랭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시다면, 그는 30대 후반에 꽤 잘생겼고, 아주 착한 아일랜드 여자와 결혼했어요. 아마 두 번째 아내일 거예요. 보내주신 소포에 모두가 감사하고 있답니다.
우리 꼬맹이들(다섯 살짜리 여자애와 네 살배기 사내애인데)이 살판났죠. 건포도 하고 달걀로 진짜 케이크다운 케이크를 만들어줬거든요! 제가 편지한 것을 언짢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부탁이니, 프랭크한테 편지하실 때 제 편지 얘기는 말아주세요. 추신: 뭐든 런던에서 필요하신 것이 있을 경우를 위해서 뒷면에 저희 집 주소를 적을게요.
p.27
친애하는 세실리
그리고 마틴 씨께서는 한참 헛짚으셨어요. 제가 얼마나 비학구적인 사람이냐면,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다고 전해주세요. 저는 그저 어쩌다 책에 특이한 취향을 갖게 된 사람일 뿐이에요. 전부가 퀄러 쿠치라고 하는 캠브리지 교수 덕분이죠. Q라고 알려진 분인데, 열일곱 살 때 어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맞닥뜨렸죠. 그리고 제 생김새를 말하자면, 브로드웨이의 걸인만큼은 총명하게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늘 좀이슨 스웨터에 모직 바지를 껴입고 있답니다. 낮에는 난방을 해주지 않거든요.
이 아파트는 5층짜리 붉은 벽돌집으로 세입자들이 오전 9시면 모두 출근하여 6시까지 건물이 텅 비는데, 주인이 뭣 하러 1층 사는 보잘것없는 대본 검토인 겸 작가 한 사람 때문에 난방을 해주겠어요? 가엾은 프랭크, 제가 그분을 너무 못살게 굴죠. 늘 뭔가 트집을 잡아 가지고 호통을 쳐대니 말이에요. 그저 재미로 조금 놀리는 것뿐이에요. 그분이 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요.
저는 저 점잖은 영국인의 자제심에 구멍을 내보려고 애쓰는 중이랍니다. 그분한테 궤양이 생긴다면 아마 그건 제가 한 짓이겠죠. 런던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저는 임항 열차에서 내려 지저분한 보도를 이 두 발로 직접 밟을 그날을 꿈꾸며 살아간답니다. 걸어서 버클리 광장까지 올라갔다가 윈폴 거리로 내려오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런던탑 입성을 거부하고 앉았던 세인트폴 성당의 그 계단, 존 던이 앉아 연설하던 바로 그 계단을 저도 한 번 밟아보고 싶어요. 대전 중에 런던 주재원으로 나갔던 신문기자 한 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 말이 관광객들은 영국에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늘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찾는데요.
전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아갈 거라고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거기에 있어요.” 프랭크(서점 직원)의 무미건조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담긴 편지도 좋다. “친애하는 헬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먼젓번 편지에서 요청한 세 권이 일제히 당신한테 가고 있습니다. 일주일이면 도착할 겁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묻지 말아주세요. 그저 마크스 서점의 서비스라고만 생각해줘요.”


가슴을 건드는 따스한 문장들이 너무나 많지만, 이곳에 다 쓰면 그냥 책을 한 권 다 필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벌어질 듯하다. 더 좋은 문장은 가슴에 새겨둔다. 뉴욕에 사는 가난한 여류 작가와 런던의 중고 서적상이 바다를 건너 꽃 피운 우정의 편지들. 이 책을 읽으며 때로는 목이 메다가도, 유머러스한 그녀의 편지를 볼 때면 다시 웃음이 번지기도 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오늘, 편지 한 통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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