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권의 장서가 기다리고 있는 <영록 서점>
2014년의 어느 날, 일기 : 아지트를 발견하다
대학을 다닐 때였다. 전공과목은 점점 흥미를 잃어갔고, 마음은 딴 곳으로 가 있었다. 허기진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종일 책을 읽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집에 와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던, 영화와 드라마에 집중했다.
영화 <국화꽃향기>에서 대학 신입생인 남자주인공이 선배에게 붙들려 독서동아리모임에 가입한다. 그곳에서 첫 등교하던 아침, 국화꽃향기로 가득했던 그녀를 만난다. 책방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주인공을 책 틈 사이로 멍하게 바라보는 남자주인공 모습은 명장면 중 하나다. 질리도록 봤던 장면이 어느 날 궁금증으로 다가왔다. 창원이나 마산에도 저런 느낌에 헌책방이 있지 않을까? 웹서핑을 통해 마산 석전동 <영록서점>이라는 헌책방을 발견했다.
다음 날,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석전 시장을 찾았다.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지만, 간판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산나물을 팔고 계신 할머니께 여쭤보았다. 할머니 손은 뒤쪽 건물을 향했다. 2층 창가 모퉁이에 붓글씨로 ‘영록서점’이라고 붙여져 있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오래된 책 특유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2층 서점 입구부터 바닥에 잔뜩 깔린 책들이 내게 인사 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책들에 깜짝 놀랐다.
책이 길을 내고 골목을 형성했다. 대낮이었지만 깊숙이 들어가 책 제목을 확인하려면 손전등이 필요했다. 서점 사장님의 절친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는 모퉁이 구석에서 바닥에 박스를 깔고 편한 표정으로 잠을 청하고 계셨다. 편하게 책 읽다 가라고 공원에서 공수해온 듯 보이는 의자가 보였다. 자리를 잡고 책장을 넘겼다. 즐겨 보던 만화책 시리즈부터 시집, 연애소설 등 두루 읽어 내려갔다. 한참을 읽다가 시간을 보니 4시간이 흘렀다. ‘오늘부터 내 아지트!’ 라고 혼자 정했다. 그날 이후, 틈만 나면 영록서점을 들렸다. 사장님은 늘 바빠 보이셨다. 몇 번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 취업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발길이 뜸해졌다.
다시 찾게 된 간판 생긴(?) 영록서점
월급날이면 시내 서점을 들렀다. 마음은 가고 싶었지만 여러 핑계로 예전처럼 들릴 수 없었다. 언제 한 번 들려야 하는데 라고 생각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우리 단체에서는 두 달에 한 번 ‘인문학특강’을 한다.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강사는 잘 알려진 유명인부터 시작해 직업까지 다양하다. 3월 이사회에서 특강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꼭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경남에 있는 시민 중에 한 사람을 찾아보자고. 오랫동안 한 길만을 정해 달려왔던 사람을 발견해서 1년에 한 번 특강을 준비해보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신선하고 좋았다. 나와 장기하(동갑내기 간사의 별명)님 둘은 더 바빠지겠지만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의를 마치고 어떤 사람을 정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중, 영록서점 사장님이 떠올랐다. 사실 경남의 방송과 신문을 통해 몇 번이고 소개된 분이라 나름 유명한 분이셨지만, 특강은 한 번도 권유받지 못한 것을 알 게 되었다.
마음을 정했으면 움직이자. 장기하 간사님과 함께 지난주 목요일 창동으로 이사 한 영록서점(마산합포구 중성동 창동 예술촌)을 들렸다. 사장님은 컵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고 계셨다. 헌책방을 몇 번 둘러본 뒤에 사장님께 명함을 드리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좀 당혹스러워하셨다. 아무래도 특강이라는 말 자체가 부담될 거라 예상했는데 적중하고 말았다. 몇 분간의 정막이 흐른 뒤, 일단 자세한 사항을 다음에 다시 찾아와서 알려 달라고 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차차 이야기해 보자고 하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자주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다. 인증사진을 찍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헌책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