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설(슬)픈 시민가지였다
2014년 어느 날 씀
예전에 한 신문사에 잠시 소속되어 ‘시민기자’로 3개월간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선발된 시민기자는 본인이 소지한 촬영 장비로 영상을 담아 한 꼭지 뉴스를 만드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주제와 형식은 자유. 내가 바라보는 지역의 현안이나 여러 행사들을 카메라에 담으면 된다고 신문사는 말했다. 마감 날짜는 정해주지 않았고, 3개월 동안 1~2개 정도의 기사를 올리면 된다고 설명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시민기자로써 직접 현장을 찾아가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글로 기사를 작성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지원했는데, VJ특공대도 아니고... 카메라 촬영과 영상 편집은 나에게 낯선 영역이었다. 하지만 기자로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마음을 정했다.
그날부터 나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과연 어떤 것을 첫 번째 기사로 쓸까? 창원에서 실시하는 여러 축제나 행사들을 담을까 했지만, 그건 무언가 내 가슴을 뜨겁게 하는 기사로는 못 될 것이라 생각했다. 거듭되는 고민 속에, 정부의 노인복지 정책이 박근혜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을 언론 매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경남 지역 노인 복지에 관한 기사를 써보자.’라고 결심했다.
경남도청 노인복지 관련 부서로 전화했다. 준비해 두었던 여러 질문을 이어 나갔다. 65세 이상 노인이 경남도 전체 인구 중 12.8%(2012년 기준)을 차지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공익형 노인 일자리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7개월 근무에 소득이 월 20만 원에 그쳐, 뚜렷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통화를 마친 후, 실제 현장에서 일하시는 노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창원 상남동에 새벽 일찍부터 건물 청소를 하시는 할머니를 소개받게 되었다. 사전 통화로 협조를 구하고, 일하시는 곳으로 새벽 일찍 찾아갔다. 할머니는 밝은 미소로 맞아주셨다. 고무장갑을 여러 개 끼고 1층부터 6층까지 화장실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또한 건물 바닥 청소, 전단지 부착물 제거, 분리수거 등으로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언제부터 일을 시작하셨는지 여쭤보았다. “올해로 12년째다.”라며 “처음엔 시장서 조그마한 횟집 장사를 했다.”라고 말하셨다.
여러 가지로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직업 정신이 투철하신 할머니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질문을 이어갈수록 할머니의 답변은 미온적이었다. 순간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고 기사만을 위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취재’가 아닌 ‘방해’에 가까웠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할머니랑 가까워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이후, 새벽 5시가 되면 할머니 집 앞으로 찾아갔다. 따뜻한 음료를 준비하고, 함께 일터로 가는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일하러 왔을 때는 ‘청소부’라는 직업이 부끄러워서 주위 사람들한테 말도 못 하였다고 하셨다. 한 번은 추운 겨울에 맨손으로 물걸레 청소를 하다가 손이 퉁퉁 부어서 크게 고생하셨던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일한 지 12년째 되셨는데 집에서 쉬면 안 되냐고 조심스럽게 여쭸다. 할머니는 빙긋 웃으시더니 가족 이야기를 해주셨다.
3남매가 있는데 장남은 이름난 전기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장남의 첫째 아들이 이번에 서울 명문대에 진학했다고 했는데, 아들은 할머니께 딱 2년만 더 다녀 달라고 말했단다. 둘째 딸은 자녀가 후천적 하반신 마비가 오면서 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병원비가 만만치 않다고 했다. 또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막내아들은 직장이 없다. 남편은 5년 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허리 통증으로 일주일에 2번씩 병원을 찾고 약을 먹어야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가 근무시간이고 휴일에도 출근한다고 하셨다. 13년 차 경력이지만, 받는 월급은 많다고 볼 수 없었다. (금액은 알지만, 할머니가 언급하지 말라고 요청하셨기에 비밀.)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안 좋았다. 내 표정을 물끄러미 보시던 할머니는 “그래도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70세 넘은 노인이 이 정도 월급 받으면서 일하는 게 쉬운 일이냐.”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와 5일 정도의 짧은 데이트를 마쳤다. 그것 말고도 공공근로하시는 어르신들을 몇 분 더 만났는데 어려운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취재를 마치고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취재한 내용과 영상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뉴스가 되기에는 내 감정에 치우친 부분들이 많았다.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일이 한 편의 인간극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많이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울적하지는 않았다.
결국 시민기자 3개월 동안 기사를 하나도 올리지 못했다. 기사 한 건 당 수고비로 몇 만 원을 준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그런 욕심은 없었고 내가 제일 원했던 것은 가슴 뜨거운 현장 경험이었다. "스펙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얻은 경험들이 삶을 이루는 것이다."라는 말이 더욱 내 마음을 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