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프카 Oct 17. 2018

[다시 쓰는] 자유로운 인생을!

몸과 마음을 채우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늦은 새벽까지  술잔을 부딪치며 웃고 떠들어댔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대부분은 일찌감치 짐을 정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 서로 살짝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숙소를 나왔다. 오늘은 성산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12km 정도 이동하여 <잠도둑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오전부터 햇볕이  따가웠다.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외선 차단 마스크까지, 단단히 무장했다. 해안을 따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가는 길은  최고였다. 한참을 가다가 체력이 떨어지면 그늘진 벤치에 누워 쪽잠을 청했다. 쉬엄쉬엄 가다 보니  어느새 숙소까지 도착했다.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커다란 지붕이 보이는데 그곳이 오늘 내가 묵을 곳이었다. 이름은 '잠도둑 게스트하우스'다.


2만 원에 아침저녁밥을 모두 제공하는데 소문난 밥집(?)이다. 동화작가이자 큰 엄마로 불리는 사장님이 손수 요리해주시는데 '배가 터져서 더는 못  먹을 정도까지 실컷 먹어라.'라고 하신다(오늘은 제주 흑돼지!). 덕분에 두 그릇이나 먹었다.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서 시설이 크게 좋진  않지만, 말 그대로 가정집에서 마음 편하게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하룻밤을 묵는 여행자들보단 장기적으로 묵는 분들이 많았다. 더불어  여행 고수들 천지였다. 옆에서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 많은 정보가 경험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부른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어느 한 분이  여행자들끼리 자전거로 해안도로 코스 짧게 다녀와요, 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잊지 못할 풍경도 가득 담을 수 있었다.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즐거움  

잠도둑  게스트하우스는 앞서 소개한 대로 소문난 맛집이다. 주인아주머니의 솜씨 덕분에 배고픈 여행객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향한다. 단돈 2만  원에 아침, 저녁 맛있는 밥상이 나온다(8월 6일 저녁에는 제주 흑돼지로 요리한 돼지고기 볶음과 맛있는 반찬 다음 날 아침에는 전복죽이  나왔다.).  


오후 4시가 되어  남자 숙소로 들어갔더니 한 분이 본인 침대에서 휴대폰은 만지작 꺼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분에게는 인사하는 게 최고다. 큰 소리로 반갑다고  인사를 하니 놀래서 벌떡 일어났다. 훈훈한 인상에 차분한 목소리, 전형적인 엄친아로 보였다. 인천에서 왔고 나이는 32살. 대학 전공이 본인과  맞지 않아서 그대로 자퇴. 곧 여행을 준비해 호주, 아일랜드, 필리핀에서 3년 정도 생활하고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여행은 이번에 세 번째. 이상하게 이번 여행에서 만나는 분들은 정말 각자가 한 편의 소설 드라마 같다. 이분은 이번 제주도 방문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이주민으로서 정착하기 위해 왔단다.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본인이 일하고 잘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고. 그런데 이곳 밤도둑에는 벌써  일주일째라고 한다.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아침, 저녁 맛있는 밥이라고. 불안하지만 그렇다고 초조해하지 않는다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7시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한두 명씩 새로운 얼굴이 보였다. 가족끼리 온 분들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오신 50대 중반의 아저씨와 서울 처녀 한  명(‘효진’이라 부르겠다),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를 도전하는 두 명의 여학생이었다. 나와 자전거 일주 소녀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3일 이상의  장기 투숙객들이었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소화하는 겸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돌고 왔다. 씻고 책이라도 좀 보려 하는데, 새로운 남자 한 분이 나타났다. 보기 좋게 탄 피부에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젊은 '아저씨'였다. 평범한 ‘여행자’에서, 현재는 제주도에 정착해 생활한 지 2년째라고 한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빠질 수 없는 건 단연 '술'이다. 오래 봐왔던 친구처럼 친해 보이는 근육 아저씨와 효진은 술과 안주를 사 왔다. 오늘은 버섯구이에 제주도산  막걸리를 먹자고 했다. 막걸리가 입에 들어가는 순간, 세상에 이렇게나 맛있는 술이 있다니! 충격이었다. 정말 독특하고 맛있었다. 먹음직스럽게 탄  버섯은 마치 고기를 씹는 듯한 기분이었다. 맛있는 안주와 술, 그리고 좋은 사람들. 이곳이 말 그대로 천국이었다.  


저녁 8시부터  술상이 벌어졌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응급치료사로 2년간 휴가 한 번 없이 일했다는 효진은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 퇴사한 뒤 곧바로 제주도로 내려왔다. 곧 스웨덴에 갈 예정이라고 한다.  


연신 살인미소를  보이시던 50대 아저씨는 말 그대로 '여행 왕'이었다. 직장이 외국으로 자주 출장을 가는 직업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았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몇 년 전부터는 개인 블로그를 운영해 나 자신만의 기록을 위한 글쓰기에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글을 쓰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참고로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말이 많아지셨다. 하지만 절대 지루하진 않았다. 이상하게 날 좋아했다(?). 밖에 잠시  바람 쐬러 나가면 따라 나와서 일본 여행 갔다 온 상황을 자세하게! 매우 자세하게 소개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제주도가 아니라 일본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두 친구 중 한 명은 일찍 잠이 들었고, 다른 한 명은 조금 웃긴 이야기지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대학에서 연락이 와선 급하게  자기소개서를 써서 보내라는 말에, 여행까지 와서 자기소개서를 힘겹게 다 쓰고 술자리에 합류했다. 전북대를 다니는 두 친구는 식품영양 과라고  한다. 그런데 전공 말고 여성잡지 편집기로 눈길이 쏠린다고 말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친구랑 몇 개월 동안 열심히 돈 벌어서 왔다고 자랑했다.  맞다. 충분히 자랑할 정도로 그들은 멋졌다.  


나는 상대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정말. 진심으로.  결국 술자리는  새벽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빈 막걸리병은 16병... 다음 날, 오전  7시에 기상했다. 술을 그렇게 먹었는데, 속이 불편하거나 어지럽지 않았다. 개운했다. 역시 제주도 막걸리는 대박이라고  중얼거렸다. 아침밥은 전복죽.  꿀맛이었다.   


맛있게 밥을 먹고  제주도의 마지막 하루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계획을 짰다. 오전 오후 일정이 텅텅 비어 있었다(사실 애초부터 큰 계획은 없었다.). 32살 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함께 여행하실래요?,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김영갑 갤러리 전>을 구경한  뒤에, 형은 버스로 나는 자전거로 성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기서 같이 점심을 먹고 <비자림>을 가기로 했다.   


갤러리 전이 열리는  곳까지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했다. 나는 형의 용기가(제주 이민에 대해) 멋지다고 말했다. 형은 쑥스러워하며 정말 아무 계획이 없어서  걱정이다. 그런데 내 인생에 제일 중요한 건 자유라고 생각한다. 돈이 목표가 아니라 자유가 목표라고 말했다.   


갤러리 전시전을  보면서도 우리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만났다. 덕분에 간절하게 듣고  간절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방문자 숙소나 살 곳을 고민하고 있는 형에게 무언가 선물하고 싶었다. 배낭 구석에 있는 책 한 권을 빼  들었다. 이번 여행에 정말 큰 도움이 되었던 제주도 방문자 숙소 관련 책이었다. 매표소에서 펜을 잠시 빌려 책 속지에 짧은 편지를 썼다.  진심으로 꾹꾹 눌러썼다. 내용은 비밀이다.  


어쨌든 형은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이별했다.   

자전거를 타고  성산까지 가는 데는 12km 정도 된다. 밤도둑 방문자 숙소를 올 때 왔던 길은 이미 봤기에, 해안도로를 타고 가기로 했다. 찬 바닷바람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한참 페달을 밝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낯설지 않은 두 명의 여자가 힘겹게(?) 자전거 속도를 내고 있었다. "저기요!"  "어???" 숙소에서 봤던 두 친구다. 어디 가느냐고 하니까 성산 갈 거라고 한다. 목표지점이 갔다. 그래서 우리 세 명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중간에 말이 보이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계획하진 않았지만, 성산 가기 전에 <섭지코지>에 들렸다. 입을 떡 하니 벌리며  멍하게 구경했다. 두 친구가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에게 얻어먹으니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성산 일출봉이  코앞에 보일 때, 두 친구와 헤어졌다. 친구들은 숙소를 잡기 위해 나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나는 형이 있는 곳으로 갔다. 멀리서 훈훈한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어 댄다. 타던 자전거를 반납하고 밥을 먹으러 갔다. 별생각 없이 날씨도 더운데 물회 먹고 싶다, 이렇게 말했는데 형이  잘 아는 곳이 있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정말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부른 배를 잡고  그것도 모자라 아메리카노를 먹었다. 잠시 뒤 <비자림>으로 가는 버스가 왔고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탑승하는 순간을 가졌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은 최고였다. 둘이서 버스 안에서 이야기는 멈춰지지 않았다. 형은 어제까지만 해도 한 번도 안 본 사람인데 이렇게 친해져서 같이  여행하니까 정말 기분이 묘하고 좋다,라고 말했다. 나도 말을 이었다. 내 인생에서 전혀 존재하지 않던 많은 사람을 '여행자'라는 공통점 하나에  웃고 떠들 수 있는 게 너무 신기하고 감사하다고.   



<비자림>까지는  갈아타야 했다. 중간에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형에게 몇 번 타면 돼요? 이러는데 옆에 있던 여성분이 갑자기 "900"이라 말했다. “헉  누구시죠?”라고 물었더니, 죄송하다며 본인한테 말하는 줄 알고 대답했다고 했다. 괜찮다고 하며 남은 버스 시간을 확인했는데 한 시간은 더 넘게  기다려야 했다. 형은 여성분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고 우리와 같은 행선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셋이서 돈 보태서 택시 타고 가자,라고  제안했다. 오케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렇게 또 모르는 사람과 함께 여행했다.  


택시 안에서  창원에서 왔다고 말했더니 여성분이 본인도 창원에서 왔다고 한다(제주도 여행에서 벌써 두 번째). 정말 좁다 좁아. 황당해서 서로 웃었다. 옆에  있던 형도 같이 웃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무거운 짐을 맡기고 500년이 훌쩍 넘은 오랜 시간 동안 제주도의 맑은 공기로 유명한 <비자림>을 찬찬히 산책했다. 다 돌고 나오니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산책을 마치고 나와  형, 그리고 창원 분과 헤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서귀포로 친구 보러 가야 했고, 두 분은 같은 목적지로 함께 여행을 간다고 했다. 형에게  제주도에서 꼭 정착 잘해서, 내년에 또 올 테니까 그때 살아왔던 이야기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형도 알겠어요, 라며 빙긋 웃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쓰는] 바다 위에서 기록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