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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Oct 13. 2018

[다시 쓰는] 바다 위에서 기록하다

흔들리는 여객선 침대에서 쓰는 일기

저녁 7시 부산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여객선에 탑승하는 과정에서도 황당한 일이 있었다. 마산에서 사상까지 버스로 이동한 뒤, 시간 단축을 위해 택시를 잡았다. 마을 이장 느낌의 운전기사님은 혼자서 여행 가는 것이냐며 대단하다고 칭찬하셨다. 별말씀을요, 하면서 가고 있는데 생각보다 차가 많이 밀렸다. 정확히 30분 남기고 도착.


도착해서 표를 받으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있는데 온통 일본 사람들밖에 없다. 주변엔 캐리어 가방을 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경비원 아저씨에게 물어봤더니 여기는 국제 여객선 터미널이라고 한다(택시기사님 미워요). 살짝 썩은 미소를 머금고 '경보'를 시작했다. 


겨우 도착해서 간신히 배에 몸을 실었다. 한 손으로 땀을 닦아가며 배정된 방을 찾았다. 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4인실 침대방으로 표를 끊었다.). 과거 제주 여행처럼 운 좋게 4인실 방에서 혼자 쓸 수 있겠구나 하고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3인 가족과 나는 서로 못 볼 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멍하게 5초간 바라봤다. 아버지로 보이는 아저씨가 승무원에게 표를 확인하고 돌아온 뒤 오늘 하룻밤을 이름 모를 총각과 함께해야 한다고 내 귀에 다 들리게 귓속말로 아내와 딸에게 전했다. 딸은 귓속말의 개념이 없었던지 나에게 손을 가르치며 '저 아저씨?'라고 외쳤다. 나는 썩은 미소를 머금고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한 뒤 방을 나왔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괜찮지만, 저 가족이 굉장히 불편해 보인다. 어떡하지?


고민 끝에 승무원에게 내 사정을 말하고 다른 4인방으로 옮겨달라고 말했다. 김국진을 닮은 승무원은 금니를 자랑하듯 웃으며 바로 옆방으로 날 안내했다. 나는 가족이 있던 방으로 가서 짐을 챙긴 뒤, 불편하실 것 같아서 옆방으로 옮겼어요. 즐거운 여행 하세요.'라고 말했다. 가장은 아까도 그렇지만 정말 기뻐하는 데 안 기쁜 척 저희는 상관없는데, 아무튼 감사해요 라고 말했다. 


옆방으로 옮겼다. 오른쪽 1층 침대 배게 옆에 큰 배낭 하나가 있었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함께 자는 것이다. 누구일까? 마음속으로 하룻밤 마음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이름 모를 룸메이트를 기다렸다. 여행서적의 절반을 읽어갈 즈음 동네 이장 차림의 아저씨 한 분이 들어오셨다. 나는 인사한 뒤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저씨는 반갑게 날 맞아주시더니 곧 있다가 다른 아저씨 한 명을 데리고 오셨다. 원래 일행이 3명인데 미리 표를 예약하지 않아서 다 따로따로 쓰게 되었다. 총각이 괜찮다면 이 방에서 4명이어서 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살짝 불안했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완전체로 하나가 된 3명의 아저씨가 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내 나이를 말하니 참 좋을 때다, 그때쯤 우리 셋 다 장가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 분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아저씨 1(다른 분들이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푸근한 인상 최고) 
-아저씨 2(인자한 미소 속에 숨겨진 힘이 느껴진다. 알고 보니 해군 간부로 35년 하고 제대하셨다. 자랑스럽게 전역 증도 보여주심)
-아저씨 3(아저씨 2가 '맥가이버'라고 부른다. 손에 잡히면 뭐든지 만들어내는 신의 손이라고 한다. 이분은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분이 없었다면 다른 2명의 아저씨를 못 만났을 것이다.)


아들 같은 총각이 웃으면서 대화를 해가니 세 분이 기분이 좋으셨나 보다. 갑자기 어떤 술을 먹을 것이냐 물어본다. 조심스럽게 맥주 한 캔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우리만의 공간에서 파티가 이어졌다. 



오가는 술잔 속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무선 키보드와 휴대전화기를 이용해 쓰다 보니 모든 이야기를 다 쓰기에는 힘들고, 간단하게만. 그런데 이미 거의 다 쓴듯한 기분이….)


해군 아저씨 : 해군 35년 군 생활 이야기, 주특기 레이더 관찰, 같은 고향 영도! 신혼 생활 이야기, 진해 사령부 근무했던 이야기. 왜 짝 없이 혼자 왔느냐고 정곡을 찌르심.


살인미소 아저씨(사장님) : 인생은 즐겁게! 재미있게!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땀 흘려 번 돈, 그냥 본 돈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정말 사람은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좋다. 혼자 많은 곳을 여행해야 한다.


맥가이버 아저씨 : 작은 칼로 복숭아 맛있게 깎아주심. 복숭아는 썩은 게 더 맛있다!


▲ 다음 날, 제주도 무사히 도착! 살인미소, 해군,  맥가이버 아저씨 순


여행 첫날 이 정도면 '대박'이다. 그나저나 배가 많이 흔들려서 살짝 어질 하네. 눈 뜨면 제주도겠지.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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