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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러프 ROUGH

Day-tripper / 어느 보통날

심심(心尋), 마음을 찾는 시간 2화 (글:이레네)

by 춘프카
"계산서 좀 가져다주실래요?"



껌을 씹고 있는 웨이트리스가 우리 테이블을 힐끗 쳐다보고는 느린 걸음을 옮긴다. '알겠다'라든가, '잠시만요'라든가 하다못해 고개라도 좀 끄덕이면 좋겠건만 시크하기 그지없다. 같이 점심을 먹은 친구 D는 이미 짜증이 난 상태다. 계산서를 가져다 달라고 한 게 벌써 세 번째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얼음이 녹아 옅은 빛을 내는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들이키다 테이블 위에서 신이 난 파리떼를 휘휘 쫓는다. 파나마, 그것도 점심 식사 피크 시간을 지난 식당은 마치 물속에 잠긴 것 같다. 시간도, 사람도, 모두 느릿하게 헤엄치고 있는 것만 같달까. 하물며 요즘처럼 하루 한 번 장대비가 퍼붓는 '우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이래서 파나마가 싫다니까."


그 속에서, D는 마치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육지 동물 같았다. 파나마라는 바다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급하고, 법석거리는. 뭍으로 회귀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바다를 거부하는.


"여러 나라에서 살아봤지만, 이렇게 엉망진창인데다 따분한 곳은 처음이야."


창문에 머릴 기댄 D가 미간을 좁게 모은 채 말을 잇는다. 불만과 체념이 깃든 어조의 끝에 후련함이 깃들어 있다. 내일이면 그녀는 다시 뭍으로 -한국으로- 돌아간다.


"저 봐. 또 딴짓하지? 여기 애들은 뭐 하나를 빠릿빠릿하게 하는 법이 없어."


멀리 있는 웨이트리스를 째려보는 D의 눈빛에 짜증이 가득 스민다. 말은 못 알아 들어도 불만 섞인 기운은 감지한 건지 그제서야 웨이트리스가 카드 단말기를 찾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웨이트리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데.






식당을 나선 우리는 가벼운 포옹 후 헤어졌다. 시간은 오후 4시 19분. 한숨부터 나왔다. 퇴근길 정체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나는 얼마쯤 포기한 마음으로 차에 올라타 거리에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 길은 꽉꽉 막혀있다. 안 그래도 도로의 폭이 좁은 편인데 마치 테트리스처럼 차들이 빽빽이 쌓여가는 걸 보자니 가슴이 갑갑하다. 게다가 중간중간 얌체처럼 오가는 오토바이들이 내 차의 사이드미러를 치고 가질 않나, 아슬아슬하게 스쳐가질 않나 신경을 돋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열을 삭이던 중, 저 멀리 비행기가 하늘을 지나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D가 마지막으로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넌 파나마에서 언제까지 살 거야?"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그녀는 말 안 해도 다 알겠다는 듯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살아야지. 선진국도 아니고, 파나마는 좀 희망이 없지 않아?"


'빵'하는 소리가 불현듯 터졌다. 멍하던 눈길을 허공으로 돌리니 빨간불이었던 신호등이 어느새 초록불로 바뀌어있었다. 나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차를 굴렸다. 가다 서다를 수없이 반복하며 도시의 혈관 같은 길과 골목 위를 떠다녔다. 그리고 도시를 메우는 수 많은 삶을 목격했다.


끝이 까맣게 변해가는 바나나를 좌판에 내놓고 파는 할머니와 한 송이씩 포장한 장미꽃을 판매하는 청년, 척 봐도 낡아 보이는 자전거로 하교하는 아이들. 어떤 까닭에선지 텅 비어있는 을씨년스러운 건물, 담배꽁초, 담배꽁초, 담배꽁초. 건물 앞에 쳐 놓은 철조망 구멍 사이에 꽂힌 콜라캔과 바닥에 앉아 시시덕거리는 아저씨들, 그들의 터진 운동화, 유행 지난 모자, 유럽 어느 축구팀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No, un balboa y cincuenta centavos, no mas!(1불 50센트 이상은 못 내!)"라며 샛노란 택시를 붙잡고 단호하게 흥정하는 아주머니와 그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열심히 코를 후비는 남자아이. …여기저기서 비명처럼 터지는 클랙슨 소리가 마치 경고음처럼 들렸다. 도시에 너무 많은 삶이 엉켜있다는, 과부하를 알리는 경고음.

그건 결코 희망적인 그림은 아니었다. 단지, 그냥 삶이었다. 고단해도 이고 지고 메고 갈 수 밖에 없는 삶의 풍경.



<A break in their day>, David Hettinger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집에 도착한 건 저녁 여섯시쯤이었다. 한 시간 반을 운전 한 셈이었다. 허물 벗듯 가방이며 옷가지를 던지고 침대에 누우니 살짝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저녁 바람이 불었다. 관리소에서 오늘 정원 손질을 한다고 하더니 상큼 씁쓸한 풀냄새가 코 끝을 스쳤다. 나는 방 한 켠에 녹아내리는 노을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내일은 종일 집에만 있어야지.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지난주에 사다 놓은 파파야도 있고. 아, 그라나디야, 조금 더 뒀다간 다 썩겠네. 이 김에 냉장고 파먹기도 좀 해야겠다. 그리고 주말에 대형마트에 가서 진짜 먹을 것들만, 버리지 않을 것들로만 사오는거야. 그러고보니 한국 슈퍼에 비비고 냉동 만두가 들어왔다던데 얼마나 하려나? 한 봉에 10불 이상이면 사지 말아야지. 근데 또 김치 만두 하나 있으면 라면에도 넣어 먹고, 만둣국에 넣어 먹기도 좋고, 그냥 구워서 맥주랑 먹어도 맛있는데. 그냥 살까. 아니야, 지금 물가가 많이 오르는데 일단 낭비하지 말자. …근데 만두는 어차피 냉동이니까 오래 보관이 가능하잖아?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순간, 내가 커지는 게 느껴졌다. 뻐근했던 몸마디 마디가 펴지고 쪼그라들었던 심장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차고, 묵직한 무게가 쇄골뼈를 누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머릿속을 맴도는 D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나직이 웅얼댔다. 희망이 왜 없어.

그럼 D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참 대책 없이 긍정적이다."


글쎄. 내가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희망이 그렇게 거대하고 화려하지 않다는 걸 알 뿐이지. 그저 그 뿐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서른두 살의 데이 트리퍼>라는 글에서 힌트를 얻어 글을 썼습니다.

비틀즈의 노래 중에도 'daytripper'라는 곡이 있어요!


이레네의 브런치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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