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러프 ROUGH

세라핀과 비올렛 그리고 나

선재의 시선 2화(글 : 선재)

by 춘프카

오래전부터 꿈꿔온 그림이 있다. 그림의 배경은 머나먼 프랑스이다. 도심의 파리가 아닌 외곽의 상리스 혹은 남프랑스의 소도시. 나는 영화 '세라핀'의 미술평론가이자 화상인 '우데'가 머물렀던 저택에 머물고 있다. 남부 특유의 밝은 회벽 저택에 쏟아지는 한낮의 빛, 저택의 뜰과 사위를 에워싼 녹음. 목가적 분위기 속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글을 쓰고 책장을 넘긴다.


창문을 열면 말끔한 차림으로 뜰에서 차를 마시는 우데와 저택에서 청소를 하는 세라핀이 보인다. 우데는 알지 못한다. 세라핀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마을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한 푼 두 푼 모아 미술재료를 산다는 것을. 하늘의 계시를 받아 그림을 그렸다는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자 자연애호가이다. 녹음이 우거진 들판이나 나무에 올라앉아 자연과 교감하고 흐르는 강물을 온몸으로 느낀다. 남루한 삶 속에서 누추한 집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그녀를 나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 집요함에 그녀의 예술성이 전이될 것처럼 열에 취한다.


영화 '세라핀'


혹은 영화 '비올렛' 에서 작가 비올렛이 머물렀던 산악지대의 마을은 어떠할까. 비올렛은 가난과 불행 속에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사생아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 낙태, 동성애까지, 여성의 삶과 에로티시즘을 거침없이 소설에 녹여 당대의 프랑스 예술가와 지식인에게 충격을 안긴다.*


비올렛은 오직 글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로 향하던 중 선잠에 취해 그만 목적지를 지나쳐 버린다. 버스에서 내린 비올렛은 길을 되돌아가다 산악지대의 낯선 마을에 다다른다. 호텔이 없는 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안내해 준 곳은 주인이 죽고 나서 자식들도 안 오는 집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갈색 외벽의 2층 집은 단단하면서도 고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계단을 올라 2층 창문을 열었을 때 비올렛을 맞이한 건, 바다처럼 펼쳐진 깊은 능선. 아이러니하게도 계획에 없던 포콩의 그 집은 비올렛의 안식처가 되어 집필에 몰두한다. 작가로 명성을 얻은 후에는 버스나 뚜벅이가 아닌 자신의 세단을 몰고 포콩의 집을 찾아간다.


영화 '비올렛'


비올렛이 다른 도시에 머물 동안 나는 2층 창문을 열고 깊은 능선에 우뚝 솟은 벙투산을 바라본다. 산이 나를 보듯 나는 산을 보고 종이와 펜이 아닌 노트북 자판을 열나게 두드린다. 손에 불이 나면 좋겠다.


영화는 실존 인물인 '세라핀'과 '비올렛’의 비루한 삶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덧칠한다. 나는 비루함이 아닌 밝은 볕이 쏟아지는 저택에 머물고 싶다. 작가 타이틀을 거머쥐지 못했지만, 저택 창가에 앉아 있을 소설가를 꿈꾼다. 왜 하필 프랑스인가, 모르겠다. 왜일까.




신을 찬양하며 바닥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림을 그리는 세라핀과 무작정 집을 떠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쓰는 비올렛. 그들에게 안식의 집이 있었던가. 집은 허울일 뿐이다. 형형색색의 영감이 그들을 이끌었다. 어딘가 원시적이고 날카롭고 섬뜩한 정물과 꽃이 2미터에 달하는 캔버스에 펼쳐지고, 써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자신을 쥐어짜며 쏟아낸 텍스트는 거침없다. 그들의 예술적 고뇌와 행위를 나는 선망한다. 그리고 꿈꾼다.

마호가니 책상 위 가볍고 슬림한 노트북과 어디를 가도 남부끄럽지 않을 옷차림과 가지런한 머리를, 여유로운 몸짓과 창밖의 시린 하늘을. 지금 머물고 있는 보잘것없는 호텔이 아닌 운치 있는 저택을. 배낭가방에 3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노트북, 독서대, 책 두 권, 안경, 옷가지를 챙겨 휴가지로 왔다. 며칠간 호텔에 머물며 책을 읽고 글을 퇴고하려 한다.


어딘가 부실한 에어컨디셔너를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가만히 있는 커튼을 열었다 닫아보지만 모든 게 어색하기만 하다. 창문을 열자 8월의 습한 열기가 살갗에 달라붙는다. 그리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며 버텨본다.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자판을 두드린다. 제법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열손가락이 얼마 못가 잦아들고, 반쯤 감긴 두 눈은 다시 예쁜 그림을 그린다.


* 다음 ‘비올렛’ 영화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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