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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러프 ROUGH

빈틈 있는 내가 좋아

마음을 짓는 시간 2화(글 : 꿈장)

by 춘프카

나는 올해로 8년차에 접어든 초등학교 교사이다. 벌써 나를 거쳐간 아이들이 이백여명 가까이 되고 지난해부터는 보직 업무를 맡아 '부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혹시 이 정도만 들으면 나를 꽤 베테랑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겐 아이들이 (아마도) 모르는 허당미가 있다.


# 새학년 새출발, 두렵니 얘들아. 선생님이 더 두려워


3월 2일. 어쩌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장 걱정하는 날일 것이다. '우리 반엔 어떤 친구들이 있을까? 나와 친한 친구들은 다른 반이 되었는데. 새로운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 좋으신 분이면 좋겠다.' 온갖 걱정에 잠을 설치는 아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들아, 그거 아니?

선생님이 더 떨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학기 초 스트레스가 남들보다 유난히 심했다. 중학교 입학 전에 이사를 간 탓에 초등학교 친구들과 전부 헤어졌는데 전학이 아닌 학교 재배정으로 간 거라 그 흔한 '전학생 소개'도 받지 못했다. 아무도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았고 나도 먼저 적극적으로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져 말을 거는 게 큰 미션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친구를 사귀었는데 일 년이 지나면 꼭 나만 다른 반이 되곤 했다. 어떻게 만든 친구들인데! 다시 새 친구를 사귀기 위해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눈물겨운 나날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낯 가리는 23명을 데리고 새 환경에 적응시키는 위치에 서있다. 학생일 때와 사뭇 다른 긴장감에 부담감도 더해졌다. 여기서 어른이고 리더인 내가 쭈뼛거릴 순 없는 걸. 그래서 처음 몇 년 동안은 3월 1일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첫 날의 일정을 준비하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여유로운 척, 은근히 카리스마 있는 척! 나만 바라볼 아이들에게 자신감 있게 나와 우리반을 소개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한다.


우리반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탔고 저는 이 배를 이끄는 선장이자 리더입니다. 선생님을 잘 따라오면 일 년 후 더욱 성장한 여러분의 모습을 만나게 될 거예요. 여러분이 힘들 때, 속상할 때 도와주고 즐거운 반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겠습니다. (두근!)



# 얘들아, 선생님도 못해.


아이들은 선생님이 뭐든 잘하는 줄 안다. 아닌가, 나의 착각이려나? 어쨌든, 초등학교 선생님은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친다. 가끔 영어나 과학은 교담 선생님께서 해주시지만 5-6교시 동안 다양한 과목을 매일 새롭게 가르친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를 가르칠 때는 아이들도 눈빛이 살아난다. 미술 시간에 그림을 망쳤다고 하는 아이가 있으면 어떻게든 심폐소생술을 시켜주려 한다. 그때 나를 우러러보는 아이들의 눈빛이란.. 훗.


한 때는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잘 가르쳐야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는 걸 물어보면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은 "글쎄? 선생님도 모르겠네! 같이 찾아보자."라고 말하니 차라리 마음 편하다. 하지만 체육 교육과정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배구, 뜀틀, 농구 같은 굵직한 과제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이걸 내가 어떻게 가르쳐!


그래서 사실 교육과정에 충실하지 않게 노는 시간으로 보내기도 했었다. 발야구, 축구 심판이라도 보게 되면 철판을 깔고 태연하게 외쳤다. "양심적으로 해!" "규칙에 집착하지마!" 앞구르기, 뒤구르기 같은 건 자신 있는데 그렇다고 시범은 차마 못보이겠어서 늘 입으로 때우고 체육 잘하는 아이를 시범으로 내세운다. 1학기 때는 축구를 가르쳤는데 정말 나로서는 웃긴 일이다. 축구의 축도 모르는 내가 축구를 가르친다. 칠판에 적어둔 축구 규칙을 보고 열광하던 아이들. 나조차 규칙이 헷갈려서 미리 적어둔건데 이거 돼요 저거 돼요 마구 묻는다. 응? 오프사이드..? 도통 뭔 소린 줄 모르겠다. 실전처럼 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우린 정식 축구를 하는 게 아니야. 칠판에 적은 규칙 외에는 물어보지 말아라!"


방학 전에 했던 우리반 첫 강당 축구는 분위기가 아주 열정적이고 아이들이 치열하게 몰입했는데 사실 그때 난 학년 단톡방에 축구 규칙을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유롭게 심판을 보는 척했지만 손가락은 바삐 움직였다. 그래도 긍정적이고 해맑은 우리반 아이들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축구를 즐겼다.


(까똑-) 공 밖에 나가면 상대팀이 공 발로 차주면 되지?

뭐 스로인..? 아 손으로 던져야돼?

다음주부턴 손으로 던지자고 해야겠다.^^


새로운 2학기 미션은 농구와 플로우볼이다. 중학교 때 농구 수행평가에서 C를 받은 게 생생하거늘 농구를 가르쳐야 하다니! 오늘도 열심히 선생님도 잘 하는 거 아니라고 밑밥을 깔고 입으로 때우다가 야심차게 드리블 시범을 보였다. 세상에, 농구가 체질인가! 완벽한 시범이었다. 봤지, 얘들아! 선생님이 말한 주의사항만 지키면 누구나 할 수 있어. (휴-)



# 빈틈 있는 내가 좋아


아이들의 세상에서 나는 뭐든 잘해보이는 어른이지만 사실은 허점 투성이라 늘 고군분투한다. 신규 시절에는 완벽해질 수 없음에도 완벽해야한다는 생각에 저녁 내내 수업 준비에 매달렸으며 공문서는 쓰기만 하면 오류 각. 교감샘의 전화를 매번 받아야했다. 다행히 8년 간의 경험은 완벽해지고 싶었던 나를 조금씩 깎아서 나름대로 융통성 있는 둥근 선생님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젠 아이들 앞에서 틀리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일을 하다가 실수해도 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빈틈이 있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아이들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이만큼까지 내려놓게 된 것에 감사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완벽해질 수 없어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완벽주의. 그것과 늘 씨름하며 한 발짝 한 발짝 양보하는 법을 배운다. 여전히 욕심이 있다면, 꼭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고 그래도 뭐든 최선을 다해야 좋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못하고 자신없는 걸 감출 필요 없지만 잘하는 척 하다보면 잘하게 되는 경험도 알려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 빈틈이 있는 내가 좋지만 자신감 있게 아이들을 이끄는 나의 모습을 꾸준히 만들어간다. 이런 고민이 즐거워서 좋다. 앞으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서 있을까? 지금보다 더 둥글어질지 뾰족해 질지, 여전히 내 빈틈을 좋아하고 아이들에게 좀 더 관대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여유 있는 교사가 되어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쩐지 몇 년 후 미래에도 급식 먹으러 가는 길에 굽 높은 실내화 탓에 발을 삐끗할 것 같다. 그러면서 벗겨진 실내화를 보고 "아잇, 신데렐라~"라고 웃으며 장난치겠지. 그때 내 뒤를 따라올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생각하면, 잘- 맞는 직업을 고른 게 분명하다.



"선생님. 이거 선생님이에요. 고양이 느낌으로 그려봤어요."


"선생님 자리에 가보세요! 제가 선물 올려놨어요. 선생님 그림이에요."





신과 나의 이야기 | 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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