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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Jan 16. 2023

함께 산보할까요?

우리는 항상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사이였다


낯선 광주에서의 생활도 2년 가까이 흐른 무렵이었다. 당시 아무에게도 말하진 못했지만, 마음에 품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잘 웃었고, 상냥했다. 키는 아담했지만 운전은 터프해 보였다. 직접 조수석에 타본 적은 없지만 그녀보다 몇 배는 큰 지프차를 거침없이 모는 모습이 첫인상이었다. 연세 많은 어르신들을 능숙하게 뒷자리에 태우고 "그럼, 출발할게요."라고 외치며 운전하는 모습에 바보처럼 빠졌던 게 시작이다. 


짝사랑도 광주생활처럼 2년이 돼버렸다. 적지 않은 연애를 거쳤지만 이토록 참는(?) 짝사랑은 처음이었다. 가끔씩 마주할 기회는 있었지만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필요에 의한 대화도 5분을 넘긴 적도 없었다. 그런데 매일 밤마다 잠들기 전에 상상을 하곤 했다. 혼자 자주 가는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을 둘이서 걷는 풍경을 그렸다. 찬찬히 산책하며 서로의 삶을 나누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때마다 심장이 저릴 만큼 두근거렸다. 


더 이상은 미루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딱히 연락을 주고받을 만한 기회가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날도 어김없이 잠들기 전, 그녀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확인했다. 아주 어렸을 적 모습이었는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아빠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모습이었다. 혼자 히죽거리며 침을 닦는데 평소와는 다른 상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우울해 보였다. 아. 이럴 때는 같이 산책을 해야 되는데.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되는데. 나는 당장이라도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고민 끝에 내 상태 메시지를 변경했다. 


함께, 산보


딱 5분만 있다가 지워야지. 딴청을 피우며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몇 번 훑었다. 다시 그녀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아니, 이럴 수가. 내 눈을 의심했다. 이건 분명 내게 하는 말이었다. 


함께, 걸어요


경건한 마음으로 자세를 바르게 했다. 나도 답장을 보낼 타이밍이었다. 


기다릴게요


몇 분이나 지났을까. 뜨거워지는 몸을 찬물에 씻겼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휴대폰을 살펴보니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그녀였다. 이 야심한 시간에... 전화를 걸었고 우린 제법 긴 시간 동안 두서없이 대화를 나눴다. 무슨 얘기였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확실한 건 "우리 지금 상태 메시지로 대화 나눴던 거 맞죠? 그래서 전활 걸었어요."라며 웃던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바보처럼 히죽거리며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며칠 뒤, 그토록 자주 상상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을 걸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았던지, 우린 제법 늦은 시간까지 떠들었다. 우리의 첫날이었다. 





그날 이후 내 일상이 제법 근사해졌다. 고향과도 멀어지고, 하고 싶었던 일(취재)과는 거리가 먼 업무를 하고 있어서 때때로 우울감에 빠질 때가 많았으니까. 마음이 요란할 때마다 털어놓았다. 과거에는 이런 모습으로 살아왔고 지금은 이런 상황이라고. 한참을 듣고 내가 처음 빠졌던 미소를 지으며 "계속 글을 썼으면 좋겠다."라며 "예전에 썼던 글도 몰래 읽고 있었는데, 다 좋았다. 나만 읽기 아깝다. 계속 써달라"라고 말했다. 


덕분에 시작은 했지만 푸념만 늘어놓기 바빴던 브런치를 재정비했다. 하나둘씩 일상과 사유를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썼다. 낱낱이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일상이 의미가 되는 순간이었다. 


늘 같은 자리에 서서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항상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사이였다.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찔리는 지점이 있다. 처음 짝사랑하며 혼자 무식하게 다짐했던 생각.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그 결심이 결코 변한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숙연해진다. 아내의 미소와 쏙 빼닮은 아이는 나보다 더 엄마를 위한다. 더 상냥하다. 같은 남자로서 배울만한 구석이 많다. 


막상 오래전 일을 회상하며 글을 쓰다 보니 깨달은 바가 있다. 아내와 함께 걸었던 마지막 산책길이 언제였던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프러포즈하며 말했던 약속. 살다 보면 가끔 다투기도 하겠지만, 그때마다 둘이 손잡고 산보하자고 말했는데. 더 늦기 전에 이번주에는 함께 손잡고 걸어야겠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이 달에는 순차적으로 앞선 작가님이 지정한 문장을 포함하여 글을 이어가는 글쓰기 릴레이를 진행 중입니다. 제가 지정한 문장은 <일상이 의미가 되는 순간이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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