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짜 남자는 소개팅 시간 잡기도 힘들더라.
10여 년 전, 4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져 울고 있던 나에게 나의 친구는 ‘동북아 역사대장정’이라는 여행을 추천했다. ‘법륜스님’과 같이 가는 9박 10일의 여행이었다. 역사 탐방 여행 형식의 여행이다. 최근에 탤런트 조인성 씨도 다녀왔다는 그 여행. ^^ 여행 일정이 타이트하여 딴 생각 날 틈이 없을 뿐더러, 매우 피곤하기 때문에 누우면 바로 잠이 오도록 설계되었다는 그 여행을, 친구는 내게 강력 추천했다.
“레베카, 일단 나는 가기로 했어. 너도 가고 싶으면 빨리 신청하라고. 내가 알기론 내일이 마감이야”
나도 바로 신청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사전 프로그램이 꽤나 많이 진행되었다. 1박 2일 ‘경주역사탐방’을 하면서 한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을 탑재했다. 그리고 여행 참여자 80명을 8명씩 조로 나누었고, 다양한 조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각 조마다 조장, 부조장이 있었는데 나는 그냥 조원이었다가 부조장인 친구가 갑자기 여행을 못 가게 되면서, 어쩌다 부조장이 되었다. 그렇게 부조장이 되고, 각 조의 조장과 부조장끼리 주말에 1박 2일로 대성리에 MT를 가게 되었다. 조장 부조장이 모여서 이번 여행을 안전하고 알차게 다녀올 수 있도록 ‘파이팅하자’는 취지의 단합 여행이었다. 물론 9박 10일을 함께하는 여행을 하면서 몇몇은 더 친밀해졌다. 여행 후에도 친밀해진 끼리끼리는 주말에 만나서 맥주 한 잔 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끼리 친해진 무리 중 한 명인 1조 조장님이, 무려 ‘회계사’였다. 그 친구는 이미 마음에 둔 처자가 따로 있었고. 그 친구가 자신의 회사 동료를 나에게 소개팅 해 주겠다는 것이다.
오예, 제발 해줘. 빨리 해줘. 나도 사짜 한 번 만나나 보자.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쭈욱 소개팅을 해 왔다. 내 인생 소개팅 역사 어언 13년 만에 '사'짜는 처음이다. 의사, 변호사 등의 남자를 만나겠다고 바람 한 적도 없었지만, ‘그들만의 리그’가 있는 것인지,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전문직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보통 보통 한 미모와 현실여친 몸매 때문인가. 소위 말하는 스펙도 딸리지만 ^^
“레베카 누나, XXX이라는 사람이 XXXX-XXXX 번호로 연락 갈 겁니다. 잘해 보세요~”
좋다. 지금부터 다이어트다. 헹거에 걸린 옷을 보니, 한숨이 먼저 나온다. 도대체 뭘 입고 나가란 말인가...!? 아 옷을 사야 하나, 옷에 맞춰서 구두도 사야 하나, 아... 화장도 잘 못 하는데... 원래 이뻤던 것처럼 보이려면, 헤어스타일이 제일 중요하지. 그래 파마를 할까... 이런저런 외모에의 고민을 하는 사이, 며칠이 지나도 XXX님에게서 연락이 오질 않았다. 너무 혼자 신나 했던가. 급격히 시들해져서 '내 팔자에 사짜는 무슨 사짜냐... 그냥 친구랑 맥주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소개팅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연락처를 받은 지 대략 2~3주쯤 지난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 혹시 레베카씨인가요? 제가 너무 연락이 늦었죠. 죄송합니다. 제가 XXX입니다.”
(놀라지 않은 척) “아, 네...”
“제가 요즘 프로젝트 중이라서요, 시간이 없어서요”
“아... 네...”
“주중에는 새벽 1시에서 2시에 일을 마쳐서 안 되구요. 주말에도 출근해서 시간이 없어요”
“예...? 아... 그러시구나... 그럼, 왜... 뭐... 어떻게...”
“아, 일단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미리 알려 드리구요. 혹시 시간 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 참... 뭐 어쩌라는 건가. 본인이 매우 바쁘니, 틈이 나면 만나지는 것이고, 계속 바쁘면 아쉽지만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 이런 느낌인데. 바쁘다는데 장사 있나. 일 해야지. 이상하게 섭섭한데, 그렇다고 무조건 시간 내서 만나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그냥 마음을 접고 내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5시쯤 업무를 정리하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 XXX다.
“레베카씨, 우리 오늘 만날까요? 저희 팀이 오늘 일찍 마치기로 했어요, 시간 되시나요?”
“아...? 네? 아... 시간... 되는 거 같아요...”
“그럼, 7시에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만나요”
아, 진짜 이게 무슨. 오늘 머리 감았던가...(나는 회사 다닐 때 이틀에 한 번씩 머리를 감았다). 일단 6시 땡 하고 총알같이 퇴근했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갔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게 집까지는 대략 택시로 7분 정도 걸렸다. 머리를 벅벅 감고, 검은 원피스로 후다닥 갈아입고, 잘 안 신는 구두도 신었다. 다시, 택시를 탔다.
“아저씨, 광화문이요”
택시에서 화장을 했다. 문질문질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탁탁탁탁 파우더를 바르고, 쉐이딩을 하고, 립스틱을 바르고, 립글로스까지 발랐다. 흐억. 6시 57분에 도착했다. 예아우.
7시가 되자, 전화가 걸려왔다. 저쪽에서 키가 훌쩍 큰 남자가 '슈트 빨 휘날리며' 오는 게 아닌가. 어머, 저 남자여야 해. 저 남자여야 해. 저 남자다. ‘아, 멋지시군요’ 큰 키에 넓은 어깨. 항공모함 구두. 가죽 서류가방. 귀염귀염한 동그란 얼굴에 안경을 썼다. 속쌍꺼풀이 있고, 코도 오똑하다. 호감형이다.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을 것 같다. 게다가 회계사라니.
‘저자는 왜 솔로인가. 아 바빠서구나. 그래, 내가 사귀어 드리지. 제가 사귀어 드릴게요.’
“저, 파스타 드실래요? 제가 예약해 둔 식당이 있어요.”
아, 목소리... 전화기 너머로 듣던 목소리보다 더 중저음이다. 신뢰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파스타를 먹으며, 대화가 오고 갔다. 그는 불어불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XX은행에 취직해서 다니다가 그만두고, 2년 동안 공부해서 회계사가 되었다. 그래서 나이에 비해 경력이 짧은 신참이다. 지금 1년차라서 매우 바쁘다. 그래도 나이가 있으니 여자 친구는 사귀고 싶고... 그래서 연락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로 넘어갔고,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떤 책이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긴장했을테고, 멋져 보이려고, 어려운 책 중에서 대충 제목만 이야기하고 어물쩍 내 이야기는 넘어갔던 것 같다. 그는 ‘서양미술사’라는 것이다. 서양미술사...? 아 그 검은 표지의 두꺼운 책. 그 책이 인생책이라고?
어쩜. 미술에도 조예가 있으시다니. 순간, 후줄근한 면바지 차림에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기들끼리 좋다고 웃곤 하는 공대 출신 우리 회사 남자 직원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휙-하고 지나갔다.
남자도 책을 읽는구나. 남자도 미술에 관심을 가지는구나.
그날, 나는 신종 남자 인간을 보았다.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과거 남자사를 진상규명하여, 현재 남자 남편에게 더 잘 해 주려고 합니다.
흐흐, 농담이구요
그냥 사는 게 읏따 거시기하여, 재밌는 글 좀 써보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