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첫날에 영화라니. 소개팅도 소개팅이지만, 오랜만에 평일 저녁에 일을 하지 않아서일까, 그는 들떠 있는 듯 보였다. 신나 보였다. 그렇게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보기로 했다. 영화가 9시 시작인지라, 영화 시작 시간을 기다리며 간단하게 맥주를 마셨다. 그는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빨간 볼이 귀여웠다. 영화를 보고 그가 나를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다. 같이 택시를 탔다. 당시 나는 숙명여대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지하철 숙대입구역 근처에서 내렸다. 집까지 조금 걷고 싶었다.
“저기, 우리 소주 딱 한 병만 마실까요?” 숙대역 근처 포차(소주 위주로 파는 술집)를 발견한 그가 말했다.
“네...? 지금... 그럴까요...?” 난 소주는 별로긴 하지만. 그날 기분 내려는 그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시간은 이미 저녁 1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는 연신 벌쭉 벌쭉 웃었다.
“오늘 진짜 재밌네요. 소개팅 첫날에 영화도 보고. 소주도 마시고. 우리 딱 3.5잔씩 똑같이 나눠 마십시다요”
그가 말했다. 3.5잔이라니.
“그러십시다요오오~”
소주. 역시 나는 소주 체질이 아니야. 한 잔 꼴깍 마셨더니, 말이 잘 안 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소개팅.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생판 모르는 남자와 벌써 5시간째 같이 있다 보니, 내 몸의 신경세포들이 이제는 쉬고 싶다고 내게 자꾸 신호를 보냈다. 눈도 침침해지는 것 같다. 빨리 집에 가서 드러눕고 싶다. 흐트러지는 의식의 끈을 끝까지 부여잡고, 허튼소리 안 하려고 찬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어서 소주 한 병이 비워지기를... 집이 코앞이다. 가서 자고 싶다. 일단 먹자. 배도 고프다. 파스타를 다 먹을걸...괜히 남겼어... 계란말이랑 조개탕을 먹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 여튼, 속이 채워져야 정신줄을 안 놓을 거 같았다. 그렇게 소주 한 병 각 3.5잔, 그까이꺼 30분 만에 먹었다. 그랬더니, 이 남자가 한 병 더 시키는 거다. 아... 씨...
“저... 사실, 소주 잘 못 마셔요. 이제 그만 마실까... 해요. 더 마시면 저 여기서 잘 거 같아요”
“아하 하하하하... 아, 알았어요. 네 레베카는 이제 그만 마셔요.”
그렇게, 그는 새로 시킨 소주 한 병을 혼자서 꼴깍꼴깍 다 마셨다. 계속 무슨 말을 했는데, 띄엄띄엄 기억이 난다. 누나가 두 명 있는데, 둘 다 아직 결혼을 안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좀 많이 아프시다가 돌아가셨다... 다이어트를 좀 하려고 한다... 일은 힘든데, 그래도 은행 다닐 때보다는 낫다. 3년 차가 되면 이직을 할 계획이다...
그는 말이 많았다. 정말 계속 말했다. 그간 회사-집-회사-집 하던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다가, 그날 나와의 소개팅이 어떤 ‘일탈’처럼 느껴졌던 걸까. 그는 계속 신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 사람이 귀여우면서, 살짝 짠... 하기도 했다. ‘그래요, 그랬군요, 아, 그랬어요...? 그러셨구나. 잘했어요.’ 이 말로 나는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마지막 잔, 다 마셨다. 집에 가자.
“저... 레베카, 계속 연락해도 돼... 죠?”
“아... 네에...”
그럼, 안 하려고 했더냐. 어...? 누구 마음대로. 님이 연락 안 했음, 내가 했을 거야. 이 남자야. 말이야 말이야. 내가 엄청 잠 오는 거 참고 앉아 있었던 거라고. 네가 맘에 들어서.
장장 6시간 30분의 극한 소개팅 종료.
그렇게 집에 약간의 취기를 머금은 채 들어갔다. 그런데, 침대에 막상 누우니 잠이 안 왔다. 소주 기운에 포차에서 살짝 졸 듯이 있어서였던 걸까.
아니 잠깐. 누나가 두 명이야? 근데 결혼을 안 했다고? 아... 진짜. 우짜지.. 우리가 먼저 결혼해도 되나? 그럼 시댁이 서울이야? 명절에 부산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아버지가 아프셨어? 가족력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어머니가 아들을 너무 좋아하는 캐릭터면 어떡하지? 너무 효자면 싫은데. 서울에 방 2칸짜리 빌라 전셋집이라도 얻으려면 1억은 넘게 있어야 하는데. 그래, 내가 보태주자.
소개팅 첫날. 이미, 그와 결혼해서 애를 한 두 어명 낳은 나는, 그날 밤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도저히 잠이 안 와서, 다시 맥주를 한 캔 마셨다. 에라, 모르겠다.
늦게 잠이 들었고, 다음날 택시를 타고 출근을 했다. 점심시간에 문자가 왔다.
“점심 잘 먹었어요? 좋은 오후 보내고요. 저녁에 연락할게요”
그래... 저녁에 연락하세요. 그래요.
저녁시간이 7시 8시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바쁜가 보다. 그렇게 11시. 12시. 전화기를 째려보다가,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 잠이 들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 1시 반이다.
“레베카, 늦었죠? 혹시 잤어요?”
“네... 아니요” 자고 있었지만.
“내가 그럴 줄 알고 전화했어요. 이제 집에 가는 택시예요.”
그렇게 그는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새벽 1시~2시 사이. 그러니까 본인이 퇴근하는 택시에서만, 내게 전화를 했다. 20여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전화통화. 서로의 하루의 일과를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렇게 3-4일 전화를 받다 보니, 입술에 물집이 생겼다. 피곤했던 거다. 나는 잠이 많다. 오롯이 8시간을 자야, 다음날 컨디션을 보통 정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늦은 전화는 나의 생활 패턴을 흐트러트렸다. 그렇게 전화를 받고 다시 잠을 청해도, 잠은 잘 오지 않았다. 늦잠을 자게 되었고, 매일 아침, 허겁지겁 택시로 출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