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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Nov 11. 2019

어디, 남편 모르는 카드 없어요?

   

   나의 아들들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전, 나는 자주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외출을 하곤 했다. 놀이터, 마트, 다른 아파트 단지 놀이터. 아이들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이 끽해야 이 세 군데 정도였지만, 나는 아이들과 밖에 있는 게 좋았다. 바람 쐬고 햇볕 쬐고. 그러면 좀 덜 갑갑했다. 밖에 있으면 시간도 훌쩍 갔다. 


  가을 초입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별로 살 것도 없는데, ‘아이들 요구르트나 사야지’하며 유모차를 끌고 마트로 가고 있었다. 평범한 차림의 키가 크고 늘씬한, 나이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줌마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머, 아들이네요. 몇 개월쯤 되었나요?”

  “16... 17 개월쯤 되었어요,” 내심, 반갑다. 

  “아이고 어머니 힘드시겠네. 그래, 혼자 키워요?”

  예전에 동네 할머니의 ‘힘드시겠네.’ 이 말 한마디에 엘리베이터에서 혼자 훅 하고 운 적이 있다. 내 또래의 엄마들 보다, 연배가 있으신 분들의 ‘엄마, 힘들겠다.’는 말과 눈빛에 마음이 더 훅- 하고 가라앉는 것은 왜일까.

  “주말에 시어머니가 와서 도와주시긴 해요. 그래도... 너무 힘들어요...” 

  나는 또 울먹거렸다. 나의 슬프게 흔들리는 눈빛을 알아본 아줌마는 내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기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 좀 해요.”

  라고 하신다.


  “에그... 엄마, 밥도 잘 못 챙겨 먹지? 얼굴이 많이 상했네. 그래도 애들이 얼마나 이뻐요, 나는 중학생 아들이 있는데, 애들 보니까 그때 생각나고 그러네.”

  “아, 그러시구나. 많이 키우셨네요.”

  “그래... 엄마, 뭐가 제일 힘들어요?”

  “흠... 체력적으로 힘이 달리니까, 몸이 너무 고단하구요. 애들이 너무 울어요. 우는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흔들리는 거 같아요. 그래서, 매일 이렇게 데리고 외출해요. 밖에 나와 있으면 애들이나 저나 바람도 좀 쐬고, 좀 낫죠.”

  “그러시구나. 엄마, 말하는 거 보니까. 공부도 꽤나 잘 했겠네?”

  이게 무슨...? 아닌데요... 근데, 기분은 참 좋네. 으흐. 아직, 내게 총기란 것이 남아 있었더란 말인가. 

  “아니에요...”

  “에유... 애들은 책을 많이 읽어줘야 해요. 그래서 말인데, 애들 책은 많이 읽어주시나?”

  “아... 아니요... 노력은 해요. 으흐흐...”

  “그래에? 그럼, 내가 책 하나 추천해 드릴게. 우리 애들도 내가 어릴 때 책 많이 읽어줘서 그런지, 중학생인데 공부도 곧잘 하거든.”

  “아, 정말요?" 

  “자기 언제 시간 돼? 내가 자기 집에 한 번 갈게.”

  “예에...?”

  “응,  XXX라고. 유아 전집... 나 우리 애들 어릴 때 그거 애들 읽어줬거든. 그거 자기도 한 번 사서 읽어 줘 봐”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분이 유아전집 판매원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우리집에 책 몇 권 들고 오신다는 뜻인가?’ 했다. 너무 과하게 친절하신데...? 그런데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신다. 명함이다.     


  유아교육전문 XXX 경기수원총판 지국장 서XX.     


  아, 이 분. 책 파시는 분이구나.

  “그래서 자기 전화번호가 어떻게 돼? 주소도 좀 알려줘 봐-”


  알려주면, 나는 책을 사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화를 한 20여분 나누었더니, 그간 쌓인 친분에 대한 배신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울먹이는 내 어깨를 다독여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었을까. 나는, 알려주고야 말았다. 평소 내 성격이, ‘자를 것을 자른다.’고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이었나. 육아만 해서, 사람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까.      


  나는, 서지국장 아줌마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다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 책 판매원이든 뭐든, 상관없다. 나는 말을 하고 싶었으니까. 내 이야기를 경청해서 들어주고,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군들 어떠하리.      


   며칠이 지난 후, 서지국장 아줌마가 초인종을 눌렀다. 헉, 두 명이네. 조금 젊어 보이는 보이는 여자와 함께 왔다. 김실장이라고 했다.

  “어머, 아들 키우는데도 집이 참 깔끔하네.”

   그녀들은 커다란 가방에서 아이들 교구 몇 개를 꺼낸다. 내가 서지국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김실장은 아이들과 교구로 놀아준다. 책도 읽어준다. 아이들은 처음 본 김실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웬일인지 낯가림도 없이 김실장과 눈을 맞추고 어설픈 발음으로 김실장이 발음한 단어를 따라 하기도 하며 논다.     

 

 “영아총괄, 영아동화, 영아자연과학, 이게 영아 3종 세트야. 이 동네 엄마들이 엄청 샀어, 자기도 사요. 하나 사면 나중에 둘째 낳으면 또 보고.” 

   서지국장은 내게 3종 세트를 권한다. 이 책으로 하는 수업비용은 한 달에 얼마씩 따로 내야 한다. 책사고 오늘 수업까지 신청하면 수업료 1만원 빼주겠다고 한다. 3종 세트 다 하면, 200만원에서 몇 만원 빠진다. 억.     


  “저 돈이... 없어요. 생각 좀 해 볼게요.” 나는 이렇게 비쌀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럼 어머니, 영아총괄 하나만 사셔. 그래도 수업은 가능하니까. 그렇게 수업하면서 차차 다른 것도 사면되지 뭐”

  “저... 총괄 하나만 하면.. 얼마일까요.”

  “응, 70만원 좀 넘네.”

  “예에...? 하... 저 생각 좀 해 볼게요. 저 남편이랑 상의 좀 해 보고. 다음에...”

  “어머니. 남편은 무슨 남편이야. 애들 교육은 엄마 전담이지. 엄마가 결정하는 거예요. 남자들이 뭘 알겠어요. 안 그래...?”

  지국장은 몸을 내 쪽으로 붙이며, 나직이 말을 이어간다.

  “그래... 뭐 어디, 남편 모르는 카드 없어? 요즘 엄마들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던데. 그걸로 애들 교육도 시키고. 가방도 사고 그러는 거지~. 엄마도 있지?”


  나는 그런 거 없는데... 뭐야, 난 요즘 엄마 아닌 거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200만원. 아니, 70만원. 하아... 어지럽다. 잠깐, 정신을 차리자. 우리집인데 왜 이렇게 낯설지. 나는 자리를 떠서 물을 한 잔 마셨다.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저기... 저 그런 카드 없어요. 책은 생각해 보고... 필요하면 연락드릴게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충분히 어떤 교구인지 알겠어요.”

  “어머, 애기 엄마. 기분 나빴던거야? 아니 왜 이래...”

  “그게 아니구... 저, 정말 생각해보고 사려구요. 70만원도 저에겐 큰 금액인지라.”

  “에휴... 그렇구나... 어쨌든 이 전집 사려면 이 동네는 내가 총괄이라서 나한테서 사야돼요 알았죠? 그럼 생각해보고 연락줘요.”

  “네 알겠어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에그, 애기 엄마가... 고집이 있네. 알았어. 김실장아, 교구 챙기자.”  

   

  그렇게 그들은 교구를 챙겨서 나갔다. ‘고집이 있네.’ 이게 무슨 뜻인지를 고민할 틈도 없이 애들이 울고 있었다. 자신의 장난감을 그들이 가져가는 것이라 생각했던지, 둘이 동시에 대성통곡 울고 있었다. 이 난장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마음을 달래는 데는 뽀로로가 최고다. 아이들과 나는, 그렇게 울면서 뽀로로를 보았다.


   남편이 퇴근했다. 

   “여보, 나 왔어요. 애들아, 짜잔~”

   남편은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 다닌다. 아직은 더운 날씨 탓에, 빨갛게 상기된 남편의 얼굴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보, 으으.. 오늘... 으어어.. 그러니까... 흑... 으으으으...”

   “와 이라노, 니 오늘 무슨 일 있었나...”

   “그러니까... 저기 즈언...집 판매원이 어흑...”

   “어허... 알았다. 내 씻고 나오께.”     


   아이들 재우고서야, 오늘 내가 겪은 일을 남편과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데, 실소가 나왔다. 생각해보니, 좀 웃기기도 하고. 울다가 말하다가 또 웃다가 말하다가. 남편이 말했다.

   “와, 그냥 사지 그랬노. 그냥 애들도 수업하면 안 좋겠나. 별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니가 하고 싶으면 하지 그랬노.”

   “근데 나한테 카드 없냐고. 남편 모르는 카드 없냐고. 난 없잖아. 나 무시하는건가? 그런 것도 없냐고. 그래서 안 샀어.... 모르겠다... 그냥 사기 싫었어...”

   “니, 우울증 비스므리 하니까, 정신 차릴라고 애 쓰지 마라, 그냥 되는 데로 살자. 나도 모르겠다. 우리 애들 좀 더 클 때까지는 그냥 이래 살자.”


   그냥 이렇게. 애 쓰지 말고. 정신줄 놓이면 좀 놓이는데로.     


   그런 시간이었다. 전집 판매원과의 대화마저도 그리웠던 시간. 누구라도 부여잡고, 나의 육아 외로움과 우울증을 토로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그 때, 남편이나 나나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매우 헐렁하게 살았는데, 둘 중 하나라도 파이팅하지 못하는 서로를 탓하며 미워했더라면 그 힘든 시절이 곱절로 고단 했겠지.      


   돌이켜 생각해보니, 전집을 24개월 할부로 들이고, 아이들을 영아 교육프로그램을 했어도 나쁘지 않았겠다 싶다. 일주일에 한 번 30~40분 정도, 아이들이 선생님을 만나 재밌게 놀면서 배우기도 하고. 나도 덕분에 성인과 대화도 좀 나누면서 아이들 발달에 관한 질문도 하고. 그랬으면, 독박 육아의 외로움이 조금 덜어졌을까. 아이들도 조금 더 두뇌발달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    


  지금도 그 서지국장님은, 이 신도시에서 외로움을 뚝뚝 떨어뜨리며 유모차를 끌고 있는 독박 육아 엄마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계실지, 물론 전집을 파시면서. 아주 조금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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