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니가 이렇게 못 생겼었나.

매혹과 투사 사이

by 레베카

2년 전 겨울 어느 밤, 어쩌면 오늘이 질질 끌어오던 우리의 얄팍해질 데로 얄팍해진 - 이제는 감히 우정이라 부르기도 민망해져 버린 - 우리 관계의 끝임을 직감했다. 아마도 당분간은 더 이상 S를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잘 지내라.” S의 등을 쓰다듬었다. 우리가 입은 두텁한 롱패딩의 두께가 서로의 온기 전달을 막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모임을 파하고 경기도행 광역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너무 추웠다.


엉엉. 나는 울었다. 그간에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말하며 울고, 괜히 겨울 베란다에 서서 지나가는 차를 보며 울고, 우리의 여차저차를 알고 있는 다른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털어내며 울었다. 그렇게 두어 달을 드문드문 울다 보니 아이들과 지내는 긴긴 겨울 방학도 지나갔다. 시나브로 봄이 왔고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덤덤해진 건가. 마음이 차분해지고서야 알았다. 내가 그렇게 울었던 것은, 의례였겠구나. 우정파투 통과의례.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잘 들어가지도 않는 페이스북을 열었다. 그녀의 이름을 쳤다. 친구검색을 했더니 떡 하니 나타났다. 페이스북에서 우린 아직 친구였다. S는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그간 집들이를 다녀왔네. 사진을 확장해서 보다가 놀랐다. 어? 얘 뭐야. 얘 이렇게 생겼었어...? 그렇게 그녀의 사진 몇 장을 더 보았다. 아... 이렇게... 생겼었구나. 나는 놀랐다. S는 못생긴 여자였다.


어? 눈에 힘을 주며 다시 사진을 보았다.

어? 이번엔 눈을 주먹으로 비벼본 후 다시 사진을 보았다.

어? 어? 아...


질린다는 게 이런 걸까. 이런 내 마음에 나 스스로 넌덜머리가 났다. 경상도말로, 아주 그냥 징하다 징해. 으이그... 박혜란, 너도 참...


아, 나 진심으로 S에게서 정 떨어졌구나. 정 떨어지자, 콩깍지가 벗겨졌다. 친구로 지낸 십 수년 동안 나는 그녀가 ‘많이 이쁘다’고 생각했었다. 아는 남자 후배와 선배에게 ‘내 친구 송혜교 닮았다’고 소개팅을 주선해 준 적도 여러 번이었는데... 헛. 이제 와서 어쩔 거야... 이건 뭔가 잘 못 된 거다. 아니,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 다시 한번 자세히 좀 보자... 그렇게 S의 사진을 한참 동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매도 그렇고... 흠... 피부도 그렇고... 스읍... 전체적인 얼굴이 미인상이라고 하기엔, 하 부족해 보였다.


이런 느낌. 안다. 느낌 아니까~ 내 과거에 몇 번 겪어봤더랬지.


“허... 내가 저렇게 못 생긴 얘랑 사귀었었다고...?”

뭐에 반했는지, 좋다고 좋다고 매일 밤 보고 싶고 니 생각밖에 안 나는 나를 좀 구제해 달라고 제발 나랑 사귀자고 사귀자고 마음 졸여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그와 사귀다가 헤어졌다. 헤어지고 사진을 정리하며 알았다. 아이쿠야, 저런 박남이 있나. 내 아무리 인류애적 관대함으로 남자를 만났기로서니, 이건 아니잖아. 아... 근데 이 느낌, 연인이 아니라 친구 관계에선 또 처음이네. 익숙한 듯 생경한 콩깍지 벗겨짐이다.


나는 도대체 S의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그 이전에, 우리는 어떻게 친구가 되었을까. S와 나는 내가 26살 백수시절, S는 23살 대학생 시절에 만났다. 나는 26살에 회사를 그만두고 인생의 답을 찾겠다는 이상한 가오에 빠져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 당시 별로 유명하지 않으셨던 법륜스님께서 인도 비하르 주에 수자타 아카데미라는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계셨다. 그곳에서 6개월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 인도에서 공짜로 숙식을 해결해 주신다기에, 나는 냅다 인도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말리는 부모님, 이미 던진 사표, 인생의 답을 찾겠다는 다부진 가오 - 이 삼박자가 어느 성장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딱 하고 들어맞아 -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떠난다를 외치며 인도를 갔더니만, 그곳에 이미 S가 있었다. 나는 여차저차 S외에 한국인 활동가 10여 명과 그곳에서 재미와 피로와 뱃살을 쌓으며 잘 지냈다.


당시 나의 룸메이트 S는 병원에서 일을 했고, 하루 종일 환자들을 상대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온 밤이면 내게 환자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어쩌면 모범적이었던 나의 생활에 비해, 환자들의 이야기는 버라이어티 했다. 그녀가 전해주는 동네 이야기를 저녁마다 들으며 우리는 울고 웃었다. 게다가 S는 불교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던지라, 인도 미술과 철학에 정통했다. 나는 그녀가 해 주는 인도 신화 이야기를 들으며 신기해했고, 그녀가 설명해 주는 인도 벽화와 조각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비쉬누, 쉬바, 깔리, 까르마, 찰나, 업겁, 업장 - 이런 단어들의 의미를 나는 S를 통해 조금씩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인도생활은, 이전의 회사원 생활과는 무척이나 다르게 흘러갔다. 인생의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뭔가를 알 것 같기도 하게, 하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채 6개월이 흘러갔다. 나와 S는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하며 지내다가 기간이 만료되어 활동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고가 부산이었던 내가 서울에 직장을 얻는 데 가장 큰 용기를 준 사람들은, S를 비롯한 인도에서 함께 살았던 수자타 아카데미 식구들이었다.


인도에서 함께한 세월 때문에 내가 S를 그렇게도 좋아했던 걸까. 6개월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룸메이트였다고 다 친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기간 동안 밥정이야 들어겠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S를 좋아했던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다.


내게 S는 무엇이었나.


나는 나보다 어리지만 인문학적 지식이 충만했던 S를 분명히 존경하고 부러워했다. 신화라곤 제우스 헤라 정도만을 알고 있고,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 한 구석에서 거부감의 장막이 쳐지곤 했던 나. 이런 나에게 S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전공이 불교 미술이라니! 밥벌이와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전공이 주는 그녀의 ‘있어’ 보임이라니! 당시의 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에 대한 질문을 가득 품고 있었다. 대학졸업하고 취업하고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남자 만나서 적당히 애 낳고 적당히 사는 것이 인생의 정석이라 굳게 믿고 있는 내가 속한 세상은, 너도 마땅히 그리 하라고 그 외에 무슨 답이 있겠냐고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인도로 도망쳐 숨을 고르고 고개를 돌려 다른 세계를 보고 싶었다. 그런 내게 S는, S가 알고 있는 지식은, 그리고 S가 하고 있다는 전공은 -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커다란 우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S. 불교철학과 인문학적 지식이 충만했던 S. 내가 닿고 싶었던 그 지점에 이미 정착해 있던 S. 나는 그녀에게 매료된 게다. 친해지고 싶었고 또 친해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녀가 가끔씩 던지던 날카롭고 예민했던 말들은 못 들은 척하곤 했다. 나는 그녀가 좋았으니까. 내가 알은체 하면 우리 관계가 흔들릴까 봐. 에이 뭐, 그날 컨디션이 별로였겠지. 사람 다 그렇잖아. 나도 예민한 날은 S보다 더하곤 한다며.


눈 가리고 아웅 하게 하는 그것. 한 사람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피하는 마음. 그것은 우정인가? 사랑인가? 아니면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다른 상대의 모습을 보기 두려워하는 용기 부족한 자의 자기 보호인가. 도대체... ‘한 인간의 실체란 무엇인가’. 실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체라. 이 질문은 ‘인간에게 실체란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무엇이 한 인간의 실체인가?’


무엇이 S의 실체인가. 무엇이 지금 와서 보니 오징어로 보이는 내 지난 Ex들의 실체인가. 그 이전에 무엇이 나, 박혜란의 실체인가.


나는 이 질문을 꽤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여기서 이렇게 아줌마로 사는 모습이 내 ‘실체’는 아닐 거라는 부정을 지난 10여 간 해 왔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좋은 회사에 가서 멋진 일을 하는 내 ‘실체’가 따로 있을 거라 상정해 두었다. 애 키우는 동안 잠시만 참자.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둔 - 이제는 들고 다니려면 큰 용기를 내야만 하는 무거운 가죽 가방을 들고 신발장 속에 고이 닦아 넣어둔 앵클부츠를 또각또각 신고 출근하는 나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일단은 급한 현실 육아부터 하자. 나의 멋진 ‘실체’는 잠시 접어두자. 시간이 흘러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시 나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희망하며.


아침마다 아이들이 휩쓸고 간 식탁을 물티슈로 닦으며 한숨짓는 나와 어디론가 멋지게 출근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나. 무엇이 나의 실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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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ORPG라고 아시는지? MMORPG는 대규모 다중 접속 온라인 역할 게임(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을 뜻한다. 수백, 수천 명이 동시에 같은 게임에 접속하여 협력하며 즐기는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접속 시마다 Player의 Role을 그때 그때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이 Role을 했다면, 이번에는 다른 Role을 한다. Player는 그저 Role을 할 뿐, Role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착화시키지는 않는다. 나도 Role-Playing Game처럼 살고 있다. 내 시간은 일직선으로 가고 있고, 그 타임라인에는 여러 롤을 하는 나의 모습들이 있다.


나는 엄마이자,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자, 가끔은 강사다. 이것이 그때 그때 바뀌는 나의 실체이다. 그렇기에 '무엇이 박혜란의 실체인가?'라는 질문에는 답 할 수 있다. 매번 바뀌는 여러 역할을 하며 사는 게 나라고. 그러나 '박혜란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답 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특화되고 규정된 그 어떤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S를 모른다’가 나의 결론이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그녀의 모습만을 눈 가리고 아웅 하며 선택적으로 보아왔다. 더불어 그녀와 내가 보낸 시간은 지극히 단편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하루를 24시간 통째로 경험한 적이 없다. 그녀가 나 외의 타인과 어떻게 관계하는지 - 그녀가 말해준 것을 바탕으로 어렴풋하게 이해할 뿐이다. 게다가 나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그런 혜안을 가진 사람 또한 아니다. 나는, S가 나 외의 다른 사람, 부모님과 혹은 애인과 어떻게 관계하는지 모른다. 실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와 관계하며 보여주는 그 단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인간이 맺는 관계의 흐름을 정리해 보자면, 지극히 유약한 한 개인이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에게 투사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 후, 그 사람과 내가 친구라고 혹은 애인이라고 자기 만족한다. 그러다가 보기 싫은 것을 보게 되면 ‘앗 뜨거’ 하며 도망가는 작태의 무한반복이지 싶다.


관계라. 슬프게도 나는, 타인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관계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나의 가치관 확인, 취향 확인, 그리고 그것의 확장 외에 가능한 것이 무엇일까. 우리 정말 비슷해서 잘 맞아. 우린 정말 다르지만 잘 맞아.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네가 너무 미워. 이 모든 말속에 숨어 있는 ‘나’, ‘자아’, ‘자기’. 그것을 지우는 일이 가능할까. 다만 배운 자의 배려심으로 포장하며 감추는 것 외엔.


그럼에도 타인에게 ‘내’가 나의 어떤 것을 ‘투사’하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알아챌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을 상대가 이미 가지고 있어서 부럽고 존경하고 닮고 싶어 하는, 여기 그런 ‘내’가 있다고. 그렇게 너를 보면서 내 ‘욕망’을 본다고. 이것을 알아차리기만이라도 한다면, 나는 내 인생의 연구자가 되는 것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 그러나 죽을 때까지 열망만은 죽어라 할, 나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타인들을, 나는 그들이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나만의 판단(후에 알고 보면 판단미스가 될지라도)을 확신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들에게 매료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사람들은 무심하게 무시하며, 무관심하고 예의 바르게 지나쳐 갈 것이다.


그러나 내 관계가 좀 더 성숙한 어른의 것으로 가기 위해, 나는 이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기로 했다. 다만,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 한 인간의 실체란 어차피 존재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러니, 내가 그 순간 반했던 그녀와 그의 모습은, 나와 그들의 그 당시의 빈틈없는 진실이었다. 다만 그 모습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원하지 않기에, 어쩌면 찰나적이기에 나는 그들을 이기적이게 - 나 좋자고 더 붙잡고 싶었던 걸까.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명대사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간이 그렇게 단순해? 인간이 그렇게 한 겹이야?”

나의 한 겹과, 내가 투사한 상대의 한 겹이 엮여서 만들어진 우리의 관계. 우리 앞으로 절대로 영원하지 않을 거다. 나는 변하고, 그렇게 변한 나는, 변한 너를 혹은 변하지 않는 너를 아마도 미워할 거다. 지나고 보니, 너무 못 생겼네 어쩌네 하면서. 그래서 지금을 잘 지내보자. 우리의 관계도 무조건 변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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