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성장시키는 두 소녀의 이야기
빨강머리 앤과 키다리 아저씨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둘 다 책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다 보았고 무엇을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 이상한 일이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엔 동심이 남아있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이 책에 빠지게 만들었는지 오늘은 진지하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진지한 고찰이라고 해도, 아마 내 수줍고 설레는 마음 이야기가 주가 될 것 같긴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빨강머리 앤은 아마 대부분 여성들의 꿈이자 동경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앤 관련 소품들이 많이 나오는 걸 보면 더 그래 보인다. 상상력이 풍부한 고아 소녀가 어느 오누이의 집에 양녀로 들어가 무럭무럭 자라는 이야기. 머릴러는 엄격하지만 다정하고 매슈는 수줍음을 많이 타지만 누구보다도 앤을 잘 이해해준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앤은 씩씩하고 사려깊으며 추진력있으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로 자란다.
어느 누군들 앤처럼 꿈을 꿔보지 않았으랴. 우리에게는 앤과 같은 상상력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기억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 나는 학교에 가는 길, 걸음걸음마다 머릿속으로 일기를 적곤 했었다.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앤처럼 제멋대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상상력으로 잔뜩 웅겨쥐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시절, 나의 세계는 그토록이나 크고 아름다웠다. 지금은 도통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성장하며 현실을 맞이한다. 그리고 현실에 다듬어져 사회로 나아간다. 다듬어진 우리는 타인과 날을 세우지도 않고 사회에 순응하며 데굴데굴 굴러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마음 속에 얼마나 삐죽삐죽한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한다. 아주 오래 전 덮어놓고는 잊어버렸던 상상력이다. 빨강머리 앤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사랑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나도 앤을 사랑하는지 모른다. 과거에 나의 상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으니까. 현실을 비뚤빼뚤 굴러가며 때로는 뒤로도 가던 그 걸음걸음이 있었노라고. 앤처럼 수없이 사고를 치고 혼이 나며 다듬어진 내가 있었노라고. 그래서, 앤이 그 총명함과 상상력을 잃지 않고 성장하는 모습에 감동하게 되노라고. 그렇게 홀로 뇌까려 본다.
키다리 아저씨는 조금 궤가 다르다. 제루샤 애보트(일명 주디)는 가난한 고아원 소녀이고, 부유한 한 남자(일명 키다리 아저씨)의 지원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주디는 자신이 고아원 소녀임을 밝히지 않으려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멋진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고아원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학교에 처음 간 주디는 온갖 사건사고에 휘말리지만, 동시에 그 상황을 통해 성장한다.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주디의 강인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주디는 자신을 지원한 지원자라 하더라도 당돌하게 대한다.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떄로는 간청하기도 하며,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전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주디의 학업 관련 모든 지원을 '키다리 아저씨'가 지원하고 있어 그 아저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곧 지원이 중단됨을 알 텐데도 어쩜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 지금 어른이 된 내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더 부럽고, 더 멋져 보인다.
주디도 앤도 세상을 살아가며 수많은 사건을 겪지만, 동시에 자신들에게 가장 적절한 해법을 찾아낸다. 때로는 타인을 존중하고, 때로는 자신을 존중하면서.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감동받는 이유는, 그들이 어린 시절의 동심을 환기시켜주는 것도 있을 테다. 하지만 그녀들이 보여주는 그런 강인한 '삶의 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의 나는 그것보다 좀 더 비굴하고, 좀더 게으르며, 좀더 이기적이다.
사실, 내가 주디였다면 나는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 동정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게 있어 동정은 곧 나의 윤택한 삶과 연결되기 떄문이다. 주디는 자존심을 택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판단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부끄러워진다. 아, 나는 이렇게나 가난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구나.
앤도, 주디도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맞닥뜨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한다. 나 또한 당당하게 내 삶과 마주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때마다 다시 이 책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은 적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읽어 본 모든 사람에게 다시 추천하는 바이다. 고전은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빛이 나는 법이니까.
나로서, 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