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차인이라고 부를 것인가에 대한 고민
차인茶人 이라고 하면 어쩐지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풍긴다. 도를 닦고 있을 것만 같고, 차에 대해 술술 꿰고 있을 것 같고, 차를 매일 마실 것 같으며, 예절을 엄격히 따질 것만 같다. 이건 내가 가진 편견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각기 자신이 가진 편견이 있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차인'이라고 하면 미묘하게 한복 입은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실제가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 편견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우리가 차를 마시러 갈 때마다 보이는, 한복 정갈하게 차려입은 여성의 영향일까? 다도(茶道)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 때문일까? '차'가 낯선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범상치 않은 일이기 때문일까? 아마 모두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때로는 축제 부스에서 차를 얻어 마시다 본 한복 차림의 여성이, 어느 때는 아주 멋진 예법으로 차를 우려주는 사람을 보고서, 혹은 그저 낯선 것에 나를 낯설게 하는 무언가를 덕지덕지 붙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차인의 이미지는 실제로 차를 마실 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차를 마시면서도 나를 차인이라고 부르기 어려워진다. 나는 그런 이미지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저 사람이 한복을 입고 있어서, 어려운 예법으로 차를 우려 주고 있어서, 혹은 나와는 다른 낯선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 차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겠다. 어찌보면 차인이라는 말이 낯섦을 감지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참 아쉬운 일이다. 차를 마시는 수많은 사람을 차인이라 칭해도 딱히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다. 차인은 어쩐지 굉장한 껍데기를 달고 있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함부로 내가 칭하기에는 무게감 있는 단어. 물론 여기에는 차인들 스스로도 한 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차이를 어쩐지 우리들이 갖고 있는 권력이나, 혹은 소수의 자랑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나를 '차인'으로 말했을 때 그런 이상한 오만함을 느끼곤 했다. 나는 너희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야,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차는 일상에서 마시는 기호 음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차인 또한, 차를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족하다. 차를 마시지 않더라도 차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 내가 차문헌을 배우는 교수님은 인문학부 소속으로, 한문학을 주로 하시던 분이셨다. 차 관련 문헌을 연구하시지만 차 제다 등은 잘 모르시는 분이었다. 그래도 이분은 훌륭한 차인이시다. 나보다 더 많은 차문헌을 습득하셨고, 번역하셨고, 공부하고 계시니까!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호암 문일평의 일화였다. 그는 '차고사'라는 글을 써서 조선의 차 역사와 차가 어째서 실생활에 녹아들지 못했는지를 분석하고, 차를 통해 어떻게 이익을 남겨야 하는지를 논했다. 그런데, 이분의 개인 기록에 '차를 마셨다'는 내용이 없어 차인으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사람이 소수라고 하더라도, 차를 마시는 가벼운 기호활동으로 차인 유무를 논하는 것은 내겐 어쩐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처럼 들렸다.
차인에 대한 편견이 바뀌어야 한다. 스타벅스 텀블러 안에 차가 있으면 그는 차인이다. 핫팬츠에 민소매 티를 입고도 찻잔을 들면 그는 차인이다. 차에 흥미가 없더라도 차에 대해 박식하면 차인이다. 차와 연계된 모든 사람이 차인일 수 있다. 우리는 차인을 좀 더 자유로운 이미지로 상상할 필요가 있다. 정확하게는, '낯섦'의 이미지를 덮어씌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 주위에서 차인은 매우 흔하게 보일 수 있다. 커피를 줄여야 해서 녹차를 종이컵에 우리는 내 상사,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차를 한 잔 얻어 마시는 사람, 레몬을 잘라 레몬청을 담그는 그 모든 사람들이 차인이다. 차는 생각보다 범위가 넓다. 물론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가공하여 마시는' 차를 생각하면 차는 굉장히 좁아지지만, 우리는 유자도 레몬도 히비스커스도 우려 마시는 모든 것들을 '차'라고 부르지 않던가!
그러니, 우리 모두는 차인이다.
차인을 굳이 밖에서 찾지 말자.
차를 들고 있는 우리 모두가 차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