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가깝고도 먼 섬
*
여수 터미널
오후부터 비가 세차게 몰아쳤다.
일정대로라면 정인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을 시간.
나는 터미널 창으로 떨어지는 비를 보고 있다.
방실이가 캔커피를 내민다.
별 저항없이 그것을 마시며
나는 텅빈 대합실 벤치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선 태풍주의보로 선박이 묶였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거북이라도 띄어서 옥황상제한테 물어봐야 하나봐요.”
제기랄 여기서 또 하루를 묵어야 하다니.
바다를 건너기만 하면 되는데.
터미널 근처 민박을 잡았다.
매운탕을 시키고 나는 벌써 두 병째 소주를 마시고 있다.
자글자글 끓고 있는 매운탕처럼
마음이 쪼그라든다.
정적이 감도는 밤,
나는 테이블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지하궁전 정원장은 익숙한 듯
정색한 얼굴로 나타났다.
아마 나 같이 비루한 인간들 상대 많이 해봤을 테지.
“최진수씨가 원한 선택이었고, 결혼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짜의 감정이든 진짜든 정인이는 최선을 다했고요. 어떤 문제가 됩니까?”
“당신들만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은 문제없었어.”
“흠...”
정원장이 코웃음을 쳤다.
“최진수씨는 아내의 실체를 모두 알게 되셨습니다. 설령 집으로 돌아온다 해도 가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나는 무슨 말이라도 던져 반박해야 했다.
“.....”
“해피엔딩은 당신 몫입니다. 모쪼록 성공하시길.”
그리곤 바람이 불어와 정원장을 휩쓸고 갔다.
하얗게 텅 빈 공간
나 혼자 남았다.
나는 억지로 잠에서 깼다.
백반집 창문과 유리문은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가셔. 비가 세차게 오는데?”
백반집 주인의 만류에도 나는 밖으로 나갔다.
파도가 방파제를 부술 듯 몰아쳤다.
나는 바위 중간쯤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대문짝만한 파도가 기다렸다는 듯 몰려온다.
목표물을 확인한 모양이다.
그래 어서 다가와라.
기다리고 있는데,
등 뒤가 따뜻해졌다.
방실이다.
또 너야?
그때 파도가 우리를 덮치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저씨.”
파도에 휩쓸려가려는 나를 방실이 붙든다.
마르고 가는 몸에서 강한 생명 줄이 솟아났다.
나는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내 인생에 끼어 들지마. 꺼져버리라고.”
그러자 방실이 더 세게 내 팔을 붙든다.
“살아는 있어야. 밧줄로 묶든 빌든 할 거 아냐!”
물미역처럼 젖은 머리카락 사이
가는 눈동자가 나를 쏘아본다.
“그런 의지로 어떻게 니 여자와 가족을 지켜!”
전에 없던 방실의 모습.
야구공만큼 뜨거운 것이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방실은 방파제 난간을 잡고 있었다.
나는 방실의 뺨을 후려갈겼다.
방실은 반격하듯 팔을 들어 내 뺨을 갈기려했다.
나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처절하게 두드려 패주길 바랐다.
그때 매끄럽고 촉촉한 느낌이 입술에 닿았다.
그것은 방실의 입술이다.
나는 저항 없이 그것을 받아 들였다.
**
다음날.
오후 5시 10분 여객선.
출발한 지 십 분여가 지났지만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도 각자 해결했다.
나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4층 꼭대기로 올라갔다.
먼 푸른 바다는 수평을 그었다.
공기는 산산하고 바다 내음이 정겨웠다.
바다 저편 정인이가 있다.
이제 한 고비만 넘기면 된다.
좌석으로 돌아와 보니 방실이 안 보인다.
내 좌석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있었다.
“자니? 죠스바 사다줄까?”
방실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허옇게 질린 피부와 푸른 입술은 꽤 오랫동안 참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귀 아래 키미테를 붙였다.
“평소엔 말도 잘하면서 아플 땐 왜 입이 무거운 거야.”
“......”
방실이 내 어깨로 쓰러졌다.
예전 같았다면 어깨를 튕겨서 머리를 밀어냈을 텐데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받아주었다.
배가 곡예를 타듯 좌우로 출렁였다.
창 절반이 바닷물로 채워졌다.
다행히 방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요?”
“더 자.”
“좀 좋아졌어요.”
내 어깨에 침이 고여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손으로 닦아냈다.
잠깐 눈이라도 붙였으면 됐다.
나는 키미테 케이스 뒷면
깨알 같이 적힌 글씨를 읽다가 웃음이 나왔다.
“너 어떡하냐?”
“왜요?”
“이거 봐봐.”
상자 뒷면엔 진한 글씨로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주의사항: 머리가 커질 수 있으니 조심하시오.]
그제 서야 방실이 키득키득 웃는다.
나는 손 뼘으로 방실의 머리 둘레를 쟀다.
“그러고 보니.. 조금 커진거 같은데?”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방실과 나는 갑판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방실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 황금기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난 지금까지 관심받기 위해 살았는지도 몰라요.
별난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주니까요.
그게 애정이라고 생각 했거든요.
광대기질...“
나는 방실이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에게 늘 맞추고 살았던 것 같아요.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거야 분명히.”
“하나 있었어요. 아카데미에서 만난 언니.
절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충고해주고 끌어안아주고.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방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사라졌어요.”
“...?”
“백화점에 취업했어요. 우리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소망프로젝트 경품이
된 거죠. 그 후로 소식이 끊겼어요.“
방실은 긴 눈썹을 떨어트렸다.
순간, 먼 기억이 떠올랐다.
신혼집에서 짐을 풀던 첫 날,
아내는 망연히 베란다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정인의 허리를 안았다.
아내의 눈가는 젖어 있었다.
“우는 거야?”
“아뇨. 그냥.”
“후회 돼?”
“그런게 어딨어요. 행복해서 그래요. 내가 가져도 되는건지 생각했어요.”
“가져도 돼. 내가 그렇게 해 줄게.”
정인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동기 중에 주근깨 많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귀여운 애가 있었어요. 친자매처럼 지냈는데, 오늘은 그 애가 보고 싶네요.“
주근깨에 까무잡잡한 아이가 나를 보고 있다.
“너였어?”
방실은 뜨악한 표정이었다.
내가 니 가족을 빼앗았구나.
전 생을 걸고서라도 멈추고 싶은 순간이 있다.
바로이 순간이다.
나는 두 손으로 방실의 뺨을 감싸쥐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의 형태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감정임은 분명했다.
그녀를 안고 있는데
등 뒤에서
“섬이 보인다. 다왔다.”
방실의 등 뒤로 푸른 섬이 드러났다.
나는 머슥하게 손을 내리고 난간을 잡았다.
섬은 또렷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
썬글라스 쓴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나 머리는 밤송이처럼 짧게 깎은 모습.
둘 중의 하나는 나를 알고 있던 양 두 팔을 뻗어 다가온다.
“고생많으셨습니다. 여기”
썬글라스를 벗는다.
순간 숨이 막혀왔다.
그는 나와함께 지하세계에서 불러주길 오매불망 기다리며
대기했던 붉은 얼굴.
“형씨 오랜만이야.”
“왜 여기...”
붉은 얼굴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곤 한쪽 어깨를 들썩이며 헐리우드식 제스츄어를 취했다.
“뭐 얘기가 긴데 나 이제 여기 사람이야.”
“제안을 받아들이셨나보군요?”
내가 그를 쏘아보자 그 얼굴은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
“내가 제안을 받던 말던. 그럼 넌 저 여자를
왜 여기까지 끌고왔는데!”
참. 나도 같은 놈인걸 착각했다.
방실은 고개를 숙인채 두 손으로 트렁크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 모습은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은 없었다.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알 필요 없잖아. 의외로 찾는 곳이 많더라고.
찾는 곳이 많다는 건 기분좋은 일이지.“
“잠깐 시간 좀 주세요.”
“뭐야. 정이 든겨?”
붉은얼굴이 초등학생처럼 놀리듯 목소리가 가벼워졌다.
“서방이라도 된 거야 뭐야.”
나는 방실의 트렁크를 끌었다.
최대한 그들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까지 방실을 데려갔다.
“난 여기까지야.”
그리고 방실의 팔을 잡아당겨 안았다.
“이거 진심이예요? 동정이예요?”
방실의 눈가가 붉어지고 있었다.
“뭐든 괜찮아요. 익숙한 걸요.”
내 불안정한 호흡이 빨라지고 있다.
마침내 입 밖으로 큰 숨이 튀어 나오고
눈물이 뺨을 그었다.
“휴. 너랑 하루 더 보냈다간 정말 힘들었을거야.”
“제가 또 잘못 했어요?”
나는 말없이 방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예뻐. 사랑받기 충분한 아이야. 명심해.”
방실은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눈가에선 검은 물이 떨어지고
입가의 분홍 립스틱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감동적인 말이예요. 흑흑...”
“울기는... 방실방실 웃어야지.”
붉은 얼굴과 또 다른 썬글라스가 방실의 팔을 잡아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당신이 알거 없고.”
“본인한테는 알려줘야죠.”
“아내나 찾으세요.”
다른 썬글라스가 검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찌른다.
놈이 돌아서는 순간 내 운동화에 흙이 덮혔다.
나는
“야. 너 내 신발에 흙 묻혔어!”
“이 이저씨가 진짜.”
“사과해!”
주먹이 날아온다.
드디어 참고 참았던
내 주먹의 강도를 확인해 볼 참이다.
왼손으로 그의 주먹을 막는 것 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내 무릎 뒤를 걷어찼다.
무릎이 꺾이고
나는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딱딱하고 무거운 것들이 사정없이 날아왔다.
배와 허리쪽으론 뜨거운 발길질이 가해졌다.
“흑흑...저 갈게요. 아저씨 때리지 마세요.
아저씨...”
방실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점점 먹먹해지고
부서졌다.
“방실아...”
그런데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쯧... 사람의 욕심이란 게 참 끝이 없습니다.”
흰 콧수염이다.
아니 아니... 포장마차 주인이다.
아니 둘 다의 목소리다.
“당신 이었어.”
검은 어둠 속에서 또렷한 흰 콧수염의 목소릴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파제 바위로 부서지는 성난 파도 소리만 남아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