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시리얼 넘버
*
종로5가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골목,
손바닥크기의 홀로그램 이정표가 반짝인다.
10년 전 연예계를 강타했던 가수 미로의 얼굴이 홀로그램 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공간엔 문구가 적혀있다.
[모여라! 당신의 10년 후를 위해.
-W백화점-]
“백화점은 망했지만, 대행사는 있는 모양이더라고.”
문규가 두 팔을 어깨 뒤로 젖히며 너스레를 떨었다.
올모스트 블루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얼굴이 오이처럼 긴 남자 바텐더는 컵을 전갈하게 놓은 다음,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어떻게 알았어?”
“다 구글느님 덕 아니겠어?”
문규는 바텐더를 향해 검지손가락을 까닥였다.
바텐더가 고개를 까딱하는 순간,
나는 녀석의 손가락을 눌러 내리고
고개를 저었다.
문규는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번엔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고.
문규의 두 번째 외도 장소에
잠시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미란이 경계대상 1호로 지정된 것만으로 충분하다.
“같이가 줘?”
“됐어.”
“이상한 게 있어서 그래.”
“...?”
**
막바지 장맛비가 쏟아진다.
골목은 우산 하나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이른 저녁임에도 골목은 가로등 불빛도 닿지 않을 만큼 괴괴했다.
퀴퀴한 곰팡내가 풍기고 시멘트 바닥은 이끼가 융단처럼 깔려있었다.
크으윽 우산살 벽 긋는 소리가 내 마음의 생채기를 낸다.
“길이 험합니다. 조심히 오십시오. 클클클”
조롱 섞인 웃음소리.
눅진한 습기가 온몸을 적신다.
금새 피로감이 몰려온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인적드믄 곳이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렵지만
문제는 지금 부터다.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설상가상,
건물 양쪽 나란히 가로로 두대씩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를 뛰어 넘어야 했다.
결국 우산을 접어 겨드랑이에 끼고, 실외기를 허들처럼 뛰어 넘었다.
운동화가 지면에 닿았다고 느꼈을 즈음 “으아앗!”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릎 아래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찌릿했다.
휴대폰 손전등으로 보니 실외기 밖으로 나온 철사가 무릎에 박혀 있었다.
제기랄.
선명한 핏줄기가 흰 양말을 적시고 있었다.
“앞에 누구 계십니까?”
휘파람처럼 스치듯 아득한 노인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부터 얼마나 더 가야합니까?”
대답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처벅처벅 빗물을 튕기는 노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 말고 다른 이가?
노인이 호흡소리가 가까이 들려오면서
반가움은 언짢음으로 바뀌었다.
하수구와 고등어썩은 중간정도의 비릿하고 역한 냄새를 끌고 왔기 때문이다.
“서울 이곳저곳 다녀봐도 이렇게 외진 곳은 처음입니다.”
노인은 애써 어절을 끊어 정확한 발음을 구사했지만, 동남쪽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왜. 반말 하려고?
여기서까지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다.
썩은내를 풍기는 노인이라면 더욱.
싸가지 없는 젊은이로 보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 등을 돌리자
‘쯧쯧...’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끄자.
그러나 갑자기 좌절감이 스쳤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인을 신경쓰느라 무릎에 찔린 철사를 빼내지 않았던 것이다.
철사를 떼는 과정은 예리한 칼로 무릎을 듬성 썰어낸 것 같은 통증을 동반했다.
그때 오른쪽 옆구리에 팔이 쑤욱 들어왔다.
“내 어깨를 잡고 걸으시게.”
노인은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허리를 감쌌다.
부끄러움이 스쳤다.
어느새 노인의 체취는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암흑 속에서 등대 불빛처럼 깜박이는
붉은 빛이 보였다.
목적지에 왔구나.
불빛에 다가갈수록 길은 넓어지고 드믄드믄 형체가 드러났다.
막다른 길 왼쪽에 이정표가 있다.
[AS문의 우측 150m]
코너를 돌자 백미터 전방 주광책 전구가 줄지어 켜진 3층 공장건물이 드러났다.
노인과 나는 탄성을 질렀다.
터널을 벗어난 듯 반가운 빛이다.
**
붉은 색 3층 건물은 시야가 가려진 곳까지 길게 이어져있었다.
그 앞으로 중년남성 세 명과 두 명의 중년 여성이 종종걸음으로 서 있었다.
주광색 불빛에 비친 굴곡진 얼굴 생김들은 나와 노인을 발견하곤 가늘고 뽀족한 눈빛을 쏘았다.
경계의 신호다.
건물 입구에선 정장을 입은 건장한 몸에 밤송이처럼 머리카락이 뾰족하게 솟은
두 남성이 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권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벽 기둥엔 [AS 상담 중]이라는 간판만이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다.
“여기서 얼마나 기다려야할까요?”
일행 중 얼굴이 유난히 붉은 남자가 나를 위 아래로 훑었다.
“난 삼주 됐지만, 저 친구는 두어 달 됐다더군.”
“두 달이요?”
아침은 도둑걸음처럼 다가왔다.
골목골목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자 대기자들의 낯빛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밤송이 하나가 통화를 마치곤,
둥근 배를 조이고 있던 재킷 단추 두 개를
풀었다.
“오늘 상담은 끝났습니다. 모두 돌아가세요.”
조금 더 어려보이는 밤송이가 들어가자 셔터 문이 내려갔다.
사람들은 흩어졌다.
**
다음 날 밤에도 일정은 반복되었다.
밤 10시부터 오전 여섯시까지.
8시간만 허락된 상담시간.
어느새 소문을 듣고온 모양인지 대기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은 한 주에 한 명.
언제 누가 호명될지 아무도 모르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렇게 무례한 AS가 어딨습니까?”
나는 도발했다.
“자네가 잘 모르나 본데. 아쉬운건 우리야. 저들이 아니라고.”
익숙한 듯 붉은 얼굴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밤송이들은 새벽 5시 59분면 건물 층계참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입니다. 모두 돌아가세요.”라고 말하면
셔터가 자동으로 내려갔다.
마치 저승사자가 이승으로 돌아가듯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일주일이 되면서 나는 밤송이들에게 대들었다.
“어떤 규칙도 없이 마냥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는 게 어딨습니까?”
밤송이는 콧구멍으로 김을 쏟았다.
“선생님은 규칙도 모르고 응모 하셨습니까?”
젊은 밤송이 하나가 내 어깨를 툭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셔터가 내려갔다.
“자네 군대 나왔나?”
“네?”
“어디에서건 규칙이 있는거야.”
이번엔 붉근얼굴이 뜨거운 김을 뿜으며 말했다.
“왜 아무도 빌어먹을 규칙에 항의를 안하죠?”
“젊어서 그런가? 하긴... 자네처럼 젊은 친구가 또 있었지. 그 친구는 기다리다 못해 펜치를 가져와 셔터를 끊으려고 했어. 그런데...”
“?”
“내부 감전센서가 있었던 모양이야. 전기 통닭구이가 되어 나왔지.”
순간 세탁소 남자를 떠올렸다.
그을린 피부에 지친 기색이 가득한.
“그리곤 다신 나타나지 않았어.”
붉은 얼굴이 내 뺨을 검지 손가락으로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상상이 독이 되는 법이야.”
“이런 서비스는 지구상 어디에서 없는 것 같은데요?"
“그만 가자구. 자둬야 다시 오지 않겠나?”
노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손바닥에 셔터내려가는 시간을 적고 있었다.
다음 날.
친밀감이 들었다고 생각 들었는지 붉은 얼굴이 먼저와 아는 체를 했다.
“형씨는 몇 번?”
“번호요? 선착순 아닌가요?”
“이 친구 여태 그것도 몰랐단 말야? 시리얼 넘버가 있을 거 아냐?"
누가 목 뒤에 뜨거운 물을 부은 느낌이었다.
“ 십년 전 일인데 영수증이 있을리 없잖아요.”
붉은 얼굴은 정색하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잘 찾아봐. 그게 순번인데 엉뚱한짓 하고 있었네.“
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문이 열리자 점프하듯 튀어 나왔다.
이젠 점프가 가능해진 걸 보니 무릎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것이다.
현관문을 젖혀 신발 신고 안방으로 직행했다.
그리곤 옷장속 레몬 블라우스를 낚아챘다.
역시.
허리 솔기 뒤에 시리얼 넘버가 적혀 있었다.
[20201201]
그때 건이가 눈을 비비고 방으로 나왔다.
그간 서운했던 듯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오늘 밤에도 가?”
“안잤어?”
“엄마 꿈 꿨어. 그거 입고 나왔어.”
손가락으로 블라우스를 가리켰다.
아내는 자신을 찾아오라고 블라우스를 남기고 간 것이다.
뭔가 실마리를 찾은 듯 기뻤다.
나는 무릎을 꿇고 건이 두 빰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엄마 찾아올게. 잠깐 할머니 집에 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