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도] ③가해자의 엄마
선생님하고 친해지자 학교가는 게 즐거워졌다
아들은 학교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발달장애인이
저마다 다른 감각의 어려움을 갖고 있는데 아들은 미각의 예민함이 특히 두드러졌다.
3~5세까지 3년 동안 1000끼가 넘는 식사를 김치전(또는 김치)과 흰쌀밥으로만 먹었다.
다른 반찬은 입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했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했다.
한창 자라야 할 시기에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지 않으니
배만 볼록 나오고 팔다리는 나뭇가지처럼 얇고 힘이 없었다.
아들과 함께 외출할 때면 처음 보는 동네 할머니들이 혀를 차며 한마디씩 했다.
“아이고~ 엄마가 아들은 밥 안 주고 자기만 먹었나 보네”
헐. 아니거등요.
나는 굶어도 아들을 굶긴 적은 없거등요.
아들이 안 먹어 미치겠는 건 바로 나거등요.
그리고 나 그렇게 많이 안 먹거등요.
밥 차려먹을 기운이 없어서 맨날 라면 끓여 먹다 살찐 것 뿐이거등요!
물론 이런 얘기는 속으로만 하고 겉으로는 “헤헤헤”라며 웃어넘겼다.
그렇게 아들은 밥 안 주고 엄마만 밥 많이 먹는 ‘나쁜 엄마’의 오명을 벗게 된 건
유치원 특수교사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식사지도에 대한 선생님 의지는 강력했고, 김치전(또는 김치)만 먹던 아들은 드디어 다른 반찬도 먹을 수 있게 됐다. (김OO 선생님, 아들 인생의 첫 번째 은인이다)
지금 아들은 키가 엄청 큰데 모두 밥 많이 먹어서 큰 키다.
그렇게 밥 잘 먹는 아들이지만 학교에서는 통 밥을 먹지 않았다.
아들이 학교 제일의 괴물 취급을 받던 그해, 담임은 이런 아들을 안쓰럽게 여겼다.
집에서는 밥을 잘 먹는다는 말에 내게 직접 학교에 와서 식사지도를 해보면 어떠겠냐는 제안을 했다.
혹 아들에게 밥을 먹이는 ‘엄마만의 비법’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내 입장에선 감사한 일이었다.
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집에선 고봉밥을 먹는 녀석이 왜 학교에만 가면 밥을 안 먹는지.
‘신뢰’라는 단어
급식지도를 하기로 한 날이다.
학교 식당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어서 담임이 미리 영양사와 학교 측에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나는 식당 앞에서 서성이며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임 손을 잡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식당에 온 아들.
그곳에 엄마가 있자 아들은 1초 동안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좋아서 방긋방긋 웃고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고 난리가 났다.
나는 이뻐 죽겠는 내 새끼를 꼭 껴안고 둥개둥개하고 싶었지만 학교니까 꾹 참고 아들에게 평소처럼 밥을 먹이기 시작했다.
담임이 평소처럼 식판을 아들 앞에 놓았다.
나는 반찬을 스캔 후 오늘 식단에선 생선구이와 김치찌개로 아들이 밥을 먹겠다는 걸 알았다.
생선을 먹기 좋게 가위로 자른 후 “동환이가 밥 떠”라고 했다.
엄마가 와서 기분 좋은 아들은 숟가락으로 밥을 한 아름 떠먹고 생선구이도 야무지게 먹었다.
중간중간 밥에 빨간 국물(김치찌개)도 살짝 끼얹어 먹었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있는데 지켜보던 담임이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김동환. 그러면 어떡해. 빨리 평소처럼 해봐. 당황스럽게 오늘 갑자기 왜 잘 먹어”
혹시 엄마가 온 첫날이라 아들도 정신이 없어 본인의 평소 모습을 잊고(?) 얼떨결에 밥을 잘 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 번만 더 학교에 가서 급식지원을 하기로 했다.
두 번째는 더 좋아한다.
역시나 엄마를 보자마자 방긋방긋 웃기부터 하는 아이.
밥 먹는 내내 기분 좋은 감정을 숨기지 않더니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식판을 직접 들고 개수대로 가 정리까지 하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담임이 나와 함께 있는 아들 모습을 보고 ‘어떤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이후 이어진 대화에서 ‘신뢰’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동환이가 어머니를 신뢰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주신 밥도 잘 먹고 그렇게 식당에서 잘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건 내 생각이지만) 아마 담임은 이날 이후 아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친해지기’를 먼저 시도한 것 같다.
엄마하고 있을 때 김동환과 학교에서 보는 김동환은 분명 180도 다른 모습이었는데
그 차이가 신뢰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랑 친해지자
아들이 다니는 특수학교 도서관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구조다.
그동안 아들은 도서관에 가면 늘 누워 있었다고 한다.
담임은 아들에게 일련의 교육적 접근을 하기에 앞서 ‘친해지기’를 먼저 시도했다.
도서관에 누워 있을 때면 굳이 아들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선생님도 같이 눕자며 아들 옆에 함께 드러누웠다.
아니 한 단계 더.
“선생님 머리 아프니까 동환이가 선생님 팔 베게 해줘”.
팔을 베고 누운 선생님의 머리가 얼굴에 간질간질.
팔을 빼려고 하면 “아니야 더 해줘”라며 더 깊숙이 파고드는 선생님.
그럴수록 얼굴과 목, 겨드랑이가 더욱 간질간질한 아들.
아들은 웃음이 터졌고 그렇게 아들이 선생님과 ‘눈을 마주 보며 웃는’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아들은 입으로 바람을 불어 “뿌우~~~” 소리내는 걸 그렇게 재밌어했다.
상담 시 그런 얘기를 했었는데 담임은 그 점을 기억하고 아들에게 장난을 걸었다.
담임이 아들 손등에 “뿌우~~~”.
선생님이 한 번 했으니까 동환이도 선생님한테 한 번 해줘.
아들이 담임 손등에 “뿌우~~~”
이번엔 다시 담임이 아들 손등에 “뿌우~~~”
순서 바꿔서 다시, 다시, 다시.
신뢰를 얻기 위해 먼저 친해지려는 담임 노력이 빛을 발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굳게 닫혀있던 아들 마음은,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활짝 열렸다.
허허. 이토록 쉬운 남자였나 싶었을만큼.
아들에게 학교가, 더 이상 혼자 고립된 느낌을 받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학교에 가면 나랑 장난도 치고 놀아도 주는, '친밀함'을 느끼는 사람이 드.디.어. 생겼기 때문이리라.
이 당시 아들의 심리 변화는 등굣길 발걸음으로 알 수 있었다.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고 길 한가운데서 꼼짝하지 않고 버티곤 했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생글생글 웃으며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스쿨버스를 타러 가곤 했다.
선생님이 좋다.
선생님 만나러 학교에 가는 게 즐겁다.
학교가 재밌어졌다.
아들은 온몸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마음의 벽을 허문 아들은 이제 아들은 학교에서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있게 됐다.
아들이 학교에서 웃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웃다가 침이 넘어가 기침까지 할 정도로 웃음이 많은 녀석이었지만
학교에선 아들의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항상 무표정하거나 화내거나 울거나 소리 지르는 모습만이 모두가 알고 있던 아들의 모습.
물론 웃는 날도 있었는데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 미소가 아들이 최대치로 웃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아들이 학교에서도 집에서처럼 소리 내 웃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가 얼마나 천지 개벽할 일이었던지, 당시 다른 학부모들과 학교 옆 복지관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이 놀라서 내게 전화를 하곤 했다. "지금 동환이를 봤는데 동환이가 글쎄... 웃고 있었어요!!!!!!")
며칠 지나지 않아 담임으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위에 있는 사진이 그때 받은 사진이다)
아들은 체육실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학교에선 처음 보는 함박웃음.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지만 동환이랑 지낼수록 예쁜 구석도 귀여운 면도 많더라고요.”
마음이 찌잉~~~. 눈물이 찔끔.
얼마만이던가.
아들이 사고쳤다는 연락이 아닌, 아들도 예쁜 구석이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게.
네. 선생님 덕분이에요.
아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센 척하는 가면을 쓰지않아도 되도록
선생님이 손 내밀어 주셨기 때문이에요.
차갑게 쌓아 올린 아들 마음의 방어벽을 선생님이 따뜻한 온기로 녹여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3일 뒤 아들이 학교에서 닭볶음탕에 밥을 맛있게 먹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갖다 먹었다고.
아들이 선생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방증이었다.
나보다 담임이 더 기뻐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