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승연 Sep 20. 2023

[장애도] ⑤가해자의 엄마

"나에게도 함께 놀 친구가 생겼어요"


반 친구들과 책상을 붙여 앉아 물리적 거리감을 줄인 상태였지만 아들은 아직 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아들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친구들 눈에 비친 아들은  

맨날 화만 내는 아이.

맨날 울면서 소리만 지르는 아이.

자주 발버둥치고 공격하는 아이.      


“아후, 무서워. 쟤 옆엔 가지 말아야지”

아들은, ‘어떤 존재’로서, 친구들에게 심리적 낙인이 찍혀 있었다.      


아들 입장에서도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는 있었다.

방법을 몰랐다.

당최 친구들하고는 뭘 어떻게 하며 놀아야 하는 건지, 어떤 태도로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건지 아들은 방법을 몰랐다.

(‘노는 법’을 가르쳐준 적 없어도 자연스럽게 또래와 어울리기 시작한 비장애인 딸과의 차이점이다)     


친구들이 싫은 게 아니었다.

흔히 발달장애를 이론으로만 공부한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아 자폐”라고 말한다.

그것만큼 잘못 알려진 정보도 없다.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어울리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친구에게 관심 없는 게 아니라 나 자신과 내가 느끼는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을뿐이다.

(우영우 변호사도 말했다. 내 마음속은 나 자신으로 꽉 차 있다고. 그렇다고 우 변호사가 방에 틀어박혀 레고조립만 했는가? 자동차 줄만 세웠는가? 아니다. 친구와의 우정도 중요했고, 연인과의 사랑도 중요했고, 동료와의 관계도 우 변호사에겐 너무나 중요한 삶의 요소였다)


하지만 내 아들은 우 변호사가 아니다.

발달이 느려 발달장애. 그중에서도 아들은 최중증 중도 장애가 있어 친구들보다도 더 느린 속도로 성장했다.


아들이 어렸을 땐 친구에 정말로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딸 친구들 무리 안에 아들도 어울릴 수 있게 ‘환경’을 제공했지만 당시 아들의 발달 과정은 어른과의 상호작용만 가능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당시엔 그런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아들도 점점 커가면서 또래와의 상호작용이 삶에서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는 발달 단계에 들어섰다.       


놀이터에 가고 싶어 해서(놀이터 방향으로 전력 질주!) 갔는데 또래가 한 명도 없을 때(운동하는 할머니들만 있을 때), 아들은 에너지가 급속도로 다운되며 의자에 누워버리곤 했다. (그래도 집에는 안 갔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동생들, 친구들, 형님들이 놀이터에 속속 모이기 시작하면 아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갸갸갸갸갸”라는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놀이터를 뛰거나 걸었다.      


기다렸던 것이다.

또래가 그 공간을 가득 채우기를.

“이젠 어른들은 싫어. 나도 친구가 제일 좋은 나이야”

아들은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같이 놀자는 제스처를 보이진 않아도, 또래 친구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오히려 더 어렸을 땐 키즈카페 등에서 또래에게 같이 놀자는 ‘서툰’ 제스처를 보이곤 했는데 그때마다 거절당한 경험이 몸에 익었는지 어느 순간부턴 먼저 다가가지 않게 되었다)        


하루는 동네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들 발걸음이 빨라져 무슨 일인가 보니 저쪽에 또래 아이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태권도장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마침 태권도장 차가 도착했다.

아이들이 차례로 차에 탑승하자 아들도 그 줄의 마지막에 서서 차에 오르려 했다.

나도 당황하고 차량 지도 교사도 당황.


“아니야. 동환아, 친구들은 학원에 가는 거야. 우리는 집에 갈 거야”      

아들은 기어이 차에 타겠다고, 또래들이 있는 곳에 자기도 함께 있겠다고 고집.


어른들의 ‘물리적 제지’에 의해 차는 떠나고 아들은 남았다.

서러워서 우는 아들.      


‘아~ 이렇게 친구를 찾게 되는 시기가 정말로 오는구나’

속상한 건 아들인데 내 마음이 쓰렸다.      


은지 누나가 좋아요     


“까똑”

4월의 어느 날, 담임이 쉬는 시간 풍경이라며 영상을 보내왔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까르르르르~ 까르르르르르르~” 아들이 웃느라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악↗, 아악↗, 아악↗”. 아주 기분 좋을 때 내는 돌고래 소리도 내고 있었다.      

아들이 복도에서 친구와 ‘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친구가 아들을 쫓아가 목 뒤를 간질간질.

아들이 까르르르 웃으며 이쪽으로 도망, 저쪽으로 도망.

민첩하게 발달하지 못한 운동능력 덕에 몇 걸음 못 가 잡히기 일쑤.

잡힐 때마다 둘이 마주 보고 깔깔깔깔깔.      


여전히 웃느라 숨이 벅찬 아들이 친구 두 팔을 잡더니 자신의 양 옆구리에 갖다 댔다.

“앗! 저거!”

안아달라는 행동 언어가 나왔다. 그만큼 친구가 좋다는 뜻이었다.


알고 보니 이때 함께 논 친구는 두 살 위 은지(가명) 누나였다.      

은지는 담임이 전 해 맡았던 학생이었다.

은지는 다운증후군이 있었고, 다운 특유의 빛나는 밝음이 돋보이는 학생이었다.     


나는 다운증후군 친구들이 정말 사랑스럽다.

(개인별 차이는 있겠지만) 타인에게 호기심 많은 밝은 성격은 특수학교처럼 사회성 발달에 어려움을 보이는 학생이 많은 공간에서 빛과 같은 존재성을 드러낸다.        


이 친구들이 사회성 발달이 더딘 친구들을 툭툭 건드려 준다.  

몸으로 건드린다는 게 아니라 존재로 다가간다.

타인에 대한 사랑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참견하고 싶은 것도 많은 이들은 “나 여깄어. 나 좀 봐봐. 너 뭐해?”라는 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친구들에게 다가간다.       


쉬는 시간이면 은지가 담임을 종종 찾아왔다고 한다.

전 담임이었지만 그만큼 친밀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는 뜻이겠지.  


은지는 ‘용감하게도’ 아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학년이 달라 아들에게 선입견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타인에게 관심 많은 다운 특유의 다정함 때문이었을까?


은지가 아들과 놀기 시작했다.      

은지의 존재는 담임에게 영상을 받고 알게 됐다.  

중간 과정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아마 처음부터 은지와 아들이 복도를 뛰어다니며 잡기 놀이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담임은 아들과의 ‘친해지기’를 위해 쉬는 시간이면 아들과 “뿌우~”하며 손등에 방구놀이를 하고 있던 때였다.      

아마 그때 은지가 담임을 찾아왔을 거야.

자연스럽게 셋이 어울리는 기회가 생겼겠지?

선생님도 “뿌우~” 너도 “뿌우~” 나도 “뿌우~” 방구놀이부터 시작했을까?

모르겠어. 하지만 어쨌든 셋이 함께 어울리기부터 시작한 건 맞을 거야.      


그 과정에서 아들이 알게 됐겠지.   

선생님을 넘어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맨날 화를 내는 것보다 이렇게 함께 웃는 게 더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아들이 몸으로 체득(납득)하기 시작했을 거야.

그런 작은 경험부터 쌓이다 보니 쉬는 시간에 복도로 나가 둘이(선생님 없이) 잡기놀이 하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었겠지.      


처음이 있어야 다음도 있는 법     


아들이 친구와의 관계를 넓혀가는 데 있어 은지 누나의 역할은 굉장히 컸다.

‘또래와 노는 재미’를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존재였던 것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있어야 다음도 있는 법이다.      


담임은 종종 은지 누나에 대해 얘기했다.

아들 은지 누나와 노는 걸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은지 누나가 교실로 오지 않는 날이면 아들이 은지 누나가 있는 6학년 교실 앞으로 가서 서성댔다고 한다.      

자기도 눈치가 있는지 차마 형님들 교실엔 들어가지 못하고

벽에 기대 창문으로 안을 엿보며 은지 누나가 (화장실 가려고) 나오기를 기다리곤 했다고.      


아들은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있을 때 그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고 느끼면 심적으로 안정감을 얻곤 했다. (사실 누구나 그렇지만)


아들에겐 그걸 확인하는 방법이 상대의 두 손을 잡아 자기 양 옆구리에 갖다 대거나(안아달라고), 상대의 두 손을 자신의 두 볼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양 뺨을 두 손으로 만져달라고).

좋아하는 상대가 그 행동에 응하면 그때 서로의 마음이 통했다고 느끼곤 했다.      


지난 여름, 아들은 학교에서 진행한 여름 계절학기 수업에 등록했다.

2주 동안 학교에 갔는데 마침 어느 날, 등굣길에 은지를 만났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은지에게 인사하며 아들에게도 인사를 시켰다.      

“동환아, 은지 누나 있다. 은지 누나 기억하지? 옛날에 동환이랑 친하게 놀았잖아”     


은지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지 아들에게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  

(다음 해 은지가 중학생이 되면서 서로 건물이 달라져 은지와 아들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둘의 키가 똑같았는데 지금 아들은 은지 누나보다 30cm는 더 큰 상태.

커다란 아들이 은지 누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몸을 숙여 은지 누나의 두 손을 잡고 자신의 양 볼에 갖다 댔다.      


기억하고 있구나.

은지 누나를, 은지 누나에 대한 감정을, 아들이 온전히 기억하고 있구나.


은지 누나가 익숙한 듯 아들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코끝이 찌잉~      


감동의 순간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까 기대하고 있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재밌는 녀석.

갑자기 몸을 휙 돌려 학교로 뚜벅뚜벅 걸어가 버린다.

은지의 갈 곳 잃은 두 팔만 허공에.       


“아휴. 아직도 서툴구나. 아직도 서툴기 그지없어”


아들 대신 은지에게 인사하고 교실로 향했다.      

교실로 가는데 왜 그렇게 웃음이 자꾸만 나는지.

행복한 건 아들 마음일 텐데 내 마음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때리면 나도 맞을 수 있어     


그해 나는 개별화교육 회의 목표를 사회성 발달, 그 하나로 좁혔다.  

친구들과 책상을 붙여 앉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다.      


아마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을 것이다.

담임의 ‘친해지기’와 ‘마음 읽기’

은지 누나를 통해 알게 된 또래와 노는 것의 즐거움.     

그러면서 담임이 수업 중 야외활동을 늘리기 시작한 것도 나는 그 일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야외활동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무엇이 아니었다.

학교 뒷산을 산책하던가, 놀이터에 가서 시소와 뱅뱅이(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타는 등의 활동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소한 야외활동이 아들에겐 사회성 발달을 촉진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하루는 담임에게 전화를 받았다.

반에서 진현(가명)이란 아이가 있는데, 진현이가 아들 따귀를 때렸다고 했다.

싸움이 일어났냐고 묻자 그냥 한 대 맞은 아들이 울면서 상황이 종결됐다고.      


나는 웃었다.

“네. 선생님. 그냥 한 번 지켜보시죠. 아들도 알아야 해요. 자기도 그동안 친구를 때렸으니 친구에게 맞는다는 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놀라는 일인지 본인도 알아야죠. 잘 됐어요. 요놈. 이번 기회에 좀 배우기를요”     


며칠 후 또 연락이 왔다.

아들이 진현이에게 따귀를 또 한 대 맞았다고 했다.

역시 같은 상황. 아들이 한 대 맞고 우는 것으로 상황 종결.


만약 그런 행동이 앞으로도 계속 같은 패턴을 갖고 반복된다면 큰 문제로 인식하고 어른의 중재가 들어가야겠지만 아직 두 번째다. 나는 이번에도 지켜보자고 했다.


둘이 어떻게 관계를 풀어나갈지, 아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 며칠 후 연락을 받았다.


“동환이가 며칠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나 봐요. 오늘 아무런 상황이 발생한 게 없었는데 화장실 가는 길에 느닷없이 동환이가 진현이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도망가더라고요”     


아~. 이런 뒤끝 있는 녀석.

마음속에 품고 있었구나. 며칠 동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구나.

그러다 기회 포착. 너도 당해봐라. 요놈. 행동에 옮겼구나.

진현이도 한 대 맞고 우는 것으로 상황이 종결됐다고 했다.      


이렇게 한 번씩 ‘어떤 상황’을 주고받았다.

둘 다 알았을 것이다.

내가 남을 때리면 나도 남에게 맞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됐다.      


그래. 한 번씩 경험해 봤으니 됐어.

이제 어른의 중재가 개입될 시기겠지.


며칠 후 담임이 사진을 보내왔다.

외부 활동 나간 아들과 진현이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둘이 번갈아 가며 복수전까지 펼쳤으니 이제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경험도 해보라는 시도로 보였다.      

야외활동 때 일부러 아들과 진현이를 짝을 시켰다고 했다.

차례대로 뱅뱅이를 타는데 아들과 진현이가 함께 타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 아는가?

썸타는 남녀가 진짜 커플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이려면 놀이기구를 함께 타라는 말이 있다. 긴장되고 스릴 있는 감각 경험을 하는 동안 서로에게 심적으로 의지하게 되면서 관계가 깊이 발전된다고 한다.      


아들과 진현이가 짝궁으로 뱅뱅이에 올랐다.

그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담임이 빙글빙글 뱅뱅이를 돌리기 시작한다.

어엇~ 떨어지면 안 돼.

둘은 손에 힘을 주며 바짝 긴장감이 올랐을 것이다.      


빙글빙글빙글빙글.

담임이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자 몸의 감각도 넘실넘실 이상해지고 스릴도 있고 재미있다.

참으려 해도 웃음이 막 터져 나온다.


그런데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      

둘이 서로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웃음이 나는 상황에 하필이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를 보며 와르르 까르르 웃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마주 보며 웃고 났더니

이게 상황 때문에 웃은 건지, 상대 덕분에 웃은 건지,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겠지.      


“자. 학교로 돌아가자”

담임이 둘씩 손을 잡고 걷게 하는데 아들과 진현이를 짝궁으로 맺었다.


이미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어버린 몸.

둘은 저항 없이 손을 꼭 잡고 선생님 뒤를 따랐다.      


친구 손을 잡는다는 것     


이 즈음 나는 여기저기서 아들이 친구와 손잡고 있는 사진을 받기 시작했다.

담임은 담임대로 사진을 보냈고

일이 있어 학교에 갔던 다른 학부형도 아들이 친구와 손잡고 이동하는 모습이나, 친구와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선 놀라 사진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아들 짝궁은 언제나 어른이었다.

아들은 늘 담임이나 실무사 또는 공익형의 손을 잡고 이동했다.  

그랬던 아들이 친구 손을 잡기 시작한 건 대단히 큰 발전이고 변화였다.

 

친구 손을 잡아도 ‘어떤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 아들 마음이 녹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친구들 입장에서도 아들이 더 이상 무섭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들도 웃을 줄 아는 친구라는 것,

웃을 줄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 웃음이 많고 즐거운 친구라는 걸 반 친구들이 알게 됐다.

자신의 손을 기꺼이 내어줄 만큼, 아들만큼이나 반 친구들의 마음도 풀어졌다.      


이러한 변화(친구와 손잡는)는 아들이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추후 얘기하겠지만, 이 지점은 문제행동 소거에서 매우 중요하다)


친구들한테 화를 내며 손톱을 세우는 것보다

친구들과 손을 잡고 함께 웃는 게 더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아들이 체득한 덕분이다.  

아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담임이 그럴 수 있는 환경을 지속적으로 제공한 덕분이다.

        

친구가 좋아지면서 아들 마음에 첫사랑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수현이(가명). 속눈썹이 아주 길었던~, 정말 예뻤던 수현이.

수현이를 바라보는 아들 마음에 뽀롱뽀롱 찬란하고 예쁜 감정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장애도] ④가해자의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