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도] ⑥‘인기남’의 엄마
인간의 행복은 관계에서 온다
수현이는 속눈썹이 정말 길고 예뻤다.
동갑인 딸이 수현이 사진을 보고선 “와~ 진짜 속눈썹이 예술이다”며 부러워했을 정도.
담임으로부터 아들이 수현이를 좋아한다는 얘길 듣고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시 아들에겐 친하게 지내는 두 명의 여사친이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복도에서 만나 신나게 놀아주는 은지 누나도 있었고,
아들의 달라진 모습에 용기 내 다가온 같은 반 예은이(가명)도 있었다.
오히려 수현이와는 이렇다 할 상호작용이 없었다.
수현이는 전형적이라 할만한 자폐증 양상을 띠고 있어서 아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마음 안에 몽실몽실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은 평소 잘 놀아주는 누나, 같이 놀자고 다가오는 반 친구가 아닌 인형처럼 속 눈썹이 예쁜 수현이를 향했다.
허허허. 요 녀석~. 우정 따로 사랑 따로인 거냐.
그래. 잘 크고 있구나. 여느 10대처럼 그렇게 예쁜 감정이 마음속에 자라기 시작했구나.
커가는 마음
아들의 최대 장점은 투명하다는 것이다.
도무지 ‘사회적 가면’이라는 것을 쓸 줄 모른다.
속마음과 겉마음이 그냥 똑같다.
투명할 정도로 속을 훤히 다 드러낸다.
담임은 수현이만 보면 “네가 좋아”라는 감정을 온 표정으로, 온 행동으로 드러내는 아들이 그렇게 재미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현장학습을 가려고 스쿨버스에 올랐는데 아들이 수현이 옆자리에 떡하니 앉더란다.
(보통 스쿨버스에선 한 명씩 앉는다. 혹 이동 중 버스 안에서 시비가 있을까 봐)
담임은 천연덕스럽게 수현이 옆에 앉은 아들이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동환아~ 수현이 좋아? 수현이가 좋아?”라고 물었는데 아들이 수현이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방긋방긋 웃었다고.
이 얘기를 들은 후엔 나도 종종 집에서 수현이 얘길 했는데 그때마다 아들은 방긋방긋 웃곤 했다.
수현이란 이름은 아들을 웃게 만드는 마법의 묘약이었다.
사랑이 시작될 때는 상대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싶다.
아들 마음도 다르지 않았나 보다.
수현이만 보면 웃음이 나고, 수현이를 위해선 뭐든 다 하고 싶고.
평생 타인의 도움만 받아왔던 아들이, 수현이라는 ‘대상’이 생기자 타인을 위한 이타적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수현이가 팔을 계속 긁었다고 한다.
수현이를 보던 아들이 수현이 옆으로 가 팔을 같이 긁어줬다고.
하지만 힘 조절을 못 하고 언제까지 긁어야 하는지 감도 못 잡는 녀석.
수현이 팔이 빨개질 때까지 열심히 긁는 바람에 담임이 수현이 엄마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했다.
수현이 엄마는 웃으면서 기분 좋게 넘어가 주었다.
아들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수현이 ‘가방 받이’도 자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교 시간에 가방을 맬 시간이 되자 아들이 자기 가방은 매지도 않은 채 수현이 뒤로 돌아가서 수현이 가방을 손에 들고 기다렸다고 한다.
손가락 소근육 발달이 더뎌 수현이에게 직접 가방을 매주는 섬세한 작업까진 할 수 없었다.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즉 가방을 들고 기다리는 것으로 수현이를 향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엄마 좀 도와달라며 감자 한 봉지 손에 쥐어주면 길바닥에 버리고 오는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선 뒤에서 가방을 들고 기다린다고?
에라이, 이 녀석아. 고맙다. 사랑한다.
질투 하나도 안 난다.
스스로의 의지로
이 단계까지 오자 아들이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강도 10까지 폭발시키던 분노를 강도 2~3 정도로 낮춰 표현했다고 한다.
어떤 날은 자신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 강도 9의 어떤 행동을 순식간에 저지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본인도 깜짝 놀라며
(마치 “앗,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고 예전 버릇이 또 나왔어요”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곧바로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고 한다.
이전 같으면 화가 나 옆 친구로 손이 뻗을 만한 일이 발생해도 스스로 화를 억누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10년 동안 그렇게 많은 교사와 치료사와 부모와 조부모가 한마음으로 ‘잡으려’ 했던 학교에서의 문제행동(공격행동)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접근 방식에 의해 소거되고 있었다.
아들은 그해에도 학교에서 진행하는 긍정적 행동지원 대상이었다.
학교 제일의 괴물 취급을 받던 3월에 신청했는데 6월 3일, 솔루션을 위한 첫 회의가 열렸다.
ABA전문가, 담임, 생활부장 교사, 내가 한 자리에 모였다.
그날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ABA 전문가가 (담임이 3월에 작성해 놓은) 아들의 문제행동 항목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그런데 담임이 “음. 이거는 아직도 조금 나오기는 하지만 많이 없어졌고, 이거는 소거됐고, 이것도 이런 상황에선 나오지만 소거되고 있고…”라며 문제행동 항목에 줄을 쫙쫙 그어 내려간 것이다.
소거, 소거, 문제행동 소거.
생전 처음 듣는 단어이자 전율이 솟는 단어였다.
스스로 변화하기로 마음먹은 자의 의지처럼 막강한 힘은 없었다.
아들은 스스로 마음먹었다.
스스로 마음 먹자 일련의 공격행동을 ‘스스로의 의지’로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관계에 있었다.
선생님이 좋고 친구들이 좋아지면서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 감정을 절제하고 스스로 행동 양식을 바꾼 것이다.
(이미 이때는 아들이 반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장난치고 다 함께 어울려 놀고 있었다. 담임이 그런 환경을 자주 제공했다)
나도 학급의 일원
이 같은 변화에는 소속감도 한몫을 했다.
담임은 (중증의, 문제행동 있는) 아들에게도 (포기하지 않고) 1인 1역할을 부여했다.
아들이 부여받은 역할은 가방을 문 옆 서랍장에 넣고, 친구들의 알림장을 걷어 교탁 옆 바구니에 넣는 것이었다.
생전 처음 받아본 역할.
자신도 이 학급의 일원이라는 증거.
역할 수행을 잘 해내면 엄청난 사회적 보상(칭찬)을 받았다.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도 더 잘하는 법이다.
영어 선생님을 좋아했던 내가 공부에 손 놓고 살았던 시기에도 영어 공부는 했던 것처럼.
아들도 같은 마음이 작동한 듯 싶었다.
자신에게 임무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기뻤던 건지,
임수 수행 후 받는 칭찬이 좋았던 건지.
아들은 알림장을 꺼내지 않은 친구가 있으면 직접 친구 가방에서 알림장을 꺼내 바구니에 넣기도 하고,
친구 가방이 바닥에 뒹굴고 있으면 직접 가방을 집어 제자리에 정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생긴 루틴은 집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기존에 아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자기 방에다 가방을 휙~ 하고 던지곤 했다.
그러면 내가 가방을 들어 가방걸이에 걸어놓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아들은 자기 방 가방걸이에 걸린 가방을 들고 거실로 가져와 현관 옆에 놓기 시작했다.
문 옆이 가방 놓는 자리.
학급에서 맡은 역할을 집에서까지 이어가려 한 것이다.
(처음엔 다시 가방을 가방걸이로 옮기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얼마나 정색하며 다시 현관 옆으로 갖다 놓는지 웃음이 나서 그냥 그러라고 했다.
어지르는 게 아니라 자기 딴엔 정리하는 것이었기에, 다만 그 정리의 위치가 나와는 다를 뿐이었는데 그 위치가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이 루틴은 중학교 2학년인 지금까지도 이어져 언제나 아들 책가방은 현관 옆 거실에 자리 잡고 있다.
동떨어진 섬으로서의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반 구성원의 일원으로 소속감이 생기면서
아들도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고 싶어 스스로 변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가 마무리될 때 무렵 담임은 아들이 반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치고 있는 영상을 보냈다.
그러면서 말했다.
지금은 동환이가 우리 반 최고의 인기남이 되었다고.
친구들이 동환이를 제일 좋아한다고.
학기 초만 해도 아들이 무섭다며 옆에 오지도 않으려 했던 한 친구는 “우리 반에서 동환이가 제일 좋다”며 담임에게 아들과 같이 있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단다.
얼마 뒤엔 또 다른 친구도 “동환이가 제일 좋다”며 고백을 했단다.
교내 최고의 괴물에서 교실 최고의 인기남으로.
도무지 믿기지 않은 극과 극의 변화가 일어난 한 해였다.
공부도 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관계에서 온다.
학벌은, 스펙은, 돈은, 생활의 편리와 여유를 보장할 순 있지만 행복까지 보장하진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과의 관계가 행복한 사람이다.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좋은 관계 안에 있을 때 사람은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하며 작지만 단단한 행복감을 느낀다.
아들도 그랬다.
자신이 속해있는 ‘유일한 사회집단’인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자 세상 모든 일에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평생 학습 의지라곤 없던 녀석이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할렐루야!
어느 날 아침, 담임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담임과의 소통은 하교 후 이뤄지는데 이렇게 수업 중 학교에서 연락이 온다는 건 (그간의 경함에 비춰봤을 때) 불안한 징조다.
벌렁대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아들이 작업 교구를 가지고 책상에 앉아있는 사진이다.
담임은 너무 기쁜 나머지,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전하고 싶어 이른 아침에 연락했다고 했다.
아직 수업이 시작하기도 전인데 아들이 어제 하던 교구를 꺼내 책상으로 갖고 오더니 혼자서 먼저 공부(작업 활동)를 시작하더란다.
담임이 안 그래도 된다고,
수업종 치면 시작해도 된다고 만류해도 씨익 웃으며 꿋꿋이 공부(작업 활동)를 시작하더라고.
그래. 바로 이거지. 바로 이거야.
우리도 마찬가지다.
연애라도 시작할 때면 다이어트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삶의 전반적 에너지가 충만히 차올라 방 청소도, 직장생활도 열심히 한다.
공부할 때도 그렇다.
엄마가 공부하라고 잔소리할 때면 나도 그에 반항해 더더욱 공부를 안 하는 것으로 사춘기의 반항심을 드러내곤 했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을 나중에 몰아서 한꺼번에 져야 해서 힘들었지만)
하지만 내 마음 안에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가 확실했을 땐 엄마가 잔소리하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엄마가 일찍 자라고 만류해도 내 스스로 학습 열정을 불태웠다.
학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내면의 동기다.
발달장애가 있는 학생의 경우 이 내면의 동기를 끌어내는 게 유난히 더 어렵다.
집중시간도 짧고, 눈과 손의 협응도 더디고, 관심사가 한정돼 있어 더 그렇다.
그런데 아들은 주변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심리적 행복감이 학습 의욕 고취로 이어졌다.
만약 정신분석학적으로 본다면, 이때 아들은 ‘리비도’가 충만한 상태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인생이 재밌는 시기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되거나 문제행동이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선 여전히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 빈도와 강도가 이전에 비할 게 아니었다.
사랑의 상실
특별했던 어떤 해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아들의 첫사랑이었던 수현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현이는 1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갔다.
2학기부터 시작된 학교생활엔 수현이가 없었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날, 담임이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아들이 분필로 칠판에 낙서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위에 있는 사진이다)
아들은 미세운동 발달이 더디다.
아직도 젓가락질은커녕 포크질도 힘 있게 하질 못한다.
그런 상태다 보니 손가락으로 힘을 줘야 하는 그림 그리기, 선 긋기, 칠판 낙서하기 등은 가장 싫어하는 작업 활동이었다.
수현이는 마음 안에 꽃밭을 담고 사는 아이였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 앞으로 나가 칠판 가득 꽃을 그려놓곤 했단다.
그런데 수현이가 없는 하루, 이틀, 사흘, 열흘이 지나자 아들이 교실 앞으로 나가 칠판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고.
동그라미도 그릴 줄 모르는 녀석이라 수현이처럼 꽃을 그릴 순 없었지만 분필을 빙빙 돌리며 칠판 가득 무언가 그리기 시작했다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알았다.
아들이 수현이의 흔적을 쫓고 있구나.
수현이를 찾고 있구나.
담임도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아들은 생애 첫 상실감과 마주하고 있었다.
상실에 따른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마음이 찌르릉 아팠다.
동시에 수현이에게 고마웠다.
아들이 상실감을 알게 해주어서, 그런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주어서 고마웠다.
아들은 상실감을 마주해야 한다.
살면서 수많은 상실감에 마음이 애타는 경험을 하고, 그 상실을 애도하며 이겨내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쳐야 한다.
그래야 아주 먼 훗날, 엄마인 내가 없을 때 자신의 세상이 함께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나의 부재를 애도하면서 상실감을 이겨내고 자신의 남은 생을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그렇게 지옥부터 천국까지 모두 경험한 어느 해가 지나갔다.
마지막 수업이 있던 종업식 날.
나는 담임을 찾아갔다.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자꾸 울컥거려 선생님 눈도 제대로 못 쳐다봤다.
3월 초의 아들은 괴물이었다.
내가 아들을 괴물로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학교 안팎의 수많은 타인이 아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해자’의 엄마인 나는 아들이 괴물이 아니라는 항변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담임이 “책상을 붙여 같이 앉는다”는,
특수학교 안에서 시도하기 힘든 어려운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이 모든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담임 덕분에 아들은 더 큰 괴물로 자라지 않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센 척하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자기 자신의 본 모습으로 있어도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아들의 변화는 친구들에게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토록 무섭기만 했던 아들과 한 반이었음에도 그 어느 해보다 안전하고 즐거운 한 해를 보낸 것이다.
나도 담임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다.
생각만 하고 짐작만 하던 사회성의 중요성과 심리적 영역에서 관계 맺기의 중요성을 담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생애 동안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 지 아들에게 어떤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지 확실한 감을 잡았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은 선생님인데 ‘김영란법’ 때문에 선물 하나도 못 하고 밥 한 번도 같이 먹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이 졸업하는 날 담임과 함께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나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아는 가장 좋은 곳으로 모셔야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전부 다 대접해야지.
그리고 선생님을 평생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이대로만 커나가면 된다.
‘가해자의 엄마’에서 ‘인기남의 엄마’가 된 나는 자신감이 붙었다.
11살에 이만큼 성장했으니까
12살엔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하고 (조급하게 빨리 갈 필요 없으니까)
13살엔 이런 것과 이런 것을 더 시도해 보자며 장기 단기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차근차근 성장해 가면 원하는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
아들은 잘 살고 나는 잘 죽는, 그 행복한 미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새 학기를 기다리며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학교가 문을 닫았다.
역시 세상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