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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미 Nov 21. 2021

차경, 공간을 창으로 들이다.

나의 정선 관동별곡

 

내비게이션 안내로 우리는 점점 강원도 정선의 어느 깊은 산으로 빨려 들어갔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온통 초록 산과 산이었다. 기암절벽과 폭포, 산천이 완벽한 진경산수화처럼 굽이 굽이 이어 펼쳐지고 있었다. 건너 어느 산에는 햇빛 줄기들이 유독 더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고 그 산은 초록의 색이 더 밝고 따뜻해 보였다. 산과 산마다 햇빛의 농도와 나무 숲의 초록 채도가 달라서 장엄하고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드디어 시설도 멋있고 규모감도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남편이 체크인을 하는 동안 나는 로비 큰 소파에 앉아 장작 불멍을 때리며 캐리어와 함께 마치 한 덩어리의 짐처럼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가장 조용한 곳을 찾아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체크인 안내를 받고 방에 들어섰다. 눈앞에 통창으로 길게 난 창문 가득 아까 오는 길에 보았던 그 산과 기암절벽, 힘차게 내려가는 산천의 풍경이 들어왔다. 짐을 풀지도 않고 나는 통창 따라 길게 놓인 보조 소파에 기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산 위로 흘러 다니는 구름들이 가득 들어왔다. 진초록의 산과 산들 위로 비현실적인 하늘색과 흰색 구름들이 360도로 보였다. 고개를 올리거나 돌리거나 비스듬히 누워있는 내 눈에는 모두 초록, 파랑 바탕에 흰색 구름이었다. 마치 카메라로 미리 찍어놓고 화면을 빨리 돌리는 것처럼 구름이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신기해서 정지화면처럼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생각 없이 구름만 바라보았다. 한동안 “네이버 클라우드” 말고는 구름 구경도 못했던 시간을 보상받듯, 마치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하늘 바라보다 어쩌다 지나가는 비행기가 남긴 하얀색 구름 흔적을 발견하고 좋아했었던 순간들처럼. 하늘이라는 것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쳐다보게 되었던 것 같다.



“파크로쉬리조트앤웰니스”가 자리한 강원도 정선은 조선 선조시대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빼어난 산수풍경을 노래한 <관동별곡>의 배경이 된 곳 중 하나이다. 다른 곳들과 달리 아직 개발이 많이 된 곳이 아니라 관동별곡에서 노래한 절경들이 그나마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두타산과 가리왕산, 오대천, 기암절벽의 풍경들을 어디서든 볼 수 있게 객실과 모든 공간을 설계하였다고 한다. 류춘수 건축가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건축가로도 유명한데, 파크로쉬를 설계할 때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이 바로 그 풍경을 파노라마로 담아내는 것이었다. 건물 모양이 마치 산의 모양처럼 단계식으로 층고가 달리 구성되어 있는 이유도 산의 풍경을 해치지 않고 담아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컷 구름에 빠져있다 정신을 차리고 객실을 둘러보았는데 특이한 것은 커피를 제공하지 않고 대신 몸의 긴장을 풀어준다는 향긋한 고급 차가 놓여있었다. 조선시대 어느 나그네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어느 바위에서 깜박 깊은 잠이 들어 쉬었다는 “숙암”이라는 그곳의 옛 지명처럼 잠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되도록이면 권하지는 않는다는 취지였다. 


파크로쉬에서는 수영장, 야외 자쿠지, 노천 사우나, 요가명상실, 음악 감상실 어디서든 구름을 감상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특히 밤에는 날씨가 좋은 날은 옥상에 드러누워서 밤하늘 별과 구름을 볼 수 있게 푹신한 소파를 깔아준다. 달빛에 구름이 가렸다 나타났다, 진회색이 되었다 옅은 회색이 되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구름을 구경할 수 있다. 노천 사우나에서는 뜨거운 온탕과 머리 위로 느껴지는 시원한 바깥공기를 풍욕 하듯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뜨거움과 차가운 감각을 동시에 느끼면서 또 구름을 눈으로 좇고 있자면 정말 더욱더 아무 생각이 없어지곤 했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잡은 반대쪽 뷰에서 내가 새롭게 빠진 것은 바로 산의 안개라고 불리는 운무였다. 자연 속이라 그런지 뒤척임 없이 푹 자고 난 다음날 둘 다 일찍 눈이 개운하게 떠졌다. 아침 5시였나 5시 30분이었나 그 사이였다. 아침 햇빛 들어올까 쳐 놓은 커튼을 걷었더니 통창 가득 하얀 안개였다. 땅 아래부터 산 꼭대기까지 그야말로 흰색의 구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솜사탕 같은 구름이 꽉 차 있었다. 객실에 커피가 비치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닝커피에서 독립되어 있지 않는 도시인들이었다. 서울에서 야무지게 커피 드리퍼, 종이 필터, 에스프레소용으로 갈아둔 과테말라 안티구안를 챙겨 왔다. 잠이 덜 깬 어스름한 이른 아침 또는 새벽이었는데 물을 끓이고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리조트 정책에 반하는 작은 일탈인 듯 쪼르륵 커피가 드리퍼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별말 없이 둘 다 운무를 바라보았다. 바닥까지 꽉 찬 산의 안개 풍경이 신기했다. 커피를 마시고 또 새로 커피를 내리고 마시고 반복했다. 마치 무슨 새벽의 의식을 치르듯이 빈 속에 내려오는 커피가 좋았다. 그리고 점점 안개가 바닥에서부터 걷혀 가고 있었다. 조금씩 땅이 보였고 산 아래 풍경이 보였고, 더 지나면 중턱까지 보였다. 


그렇게 점심 즈음되니 산 정상까지 그리고 저 너머 다른 산들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가리왕산은 “평창동계올림픽” 알파인 스키장이 있던 곳이다. 환경단체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이천억 원의 비용을 들여 ‘한 순간의 환호’ 후 지금은 복원과 재 개장 사이에서 지역주민들과 가리왕산 그리고 자연에게 힘든 시간을 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안개가 걷힌 반대쪽 뷰는 첫 번째와 달리 환경파괴의 아픔도 같이 밀려오게 했다. 나는 마케터다. 그러다 보니 어떤 장면을 보든 환경과 공간을 복합적으로 인식해 프로모션과 공간 구성을 습관처럼 연상하고 기획하게 된다. 머릿속에서 나도 모르게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모르게 피곤해지는 ‘직업병’ 인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현재의 공간의 미래가 도시재생처럼 그려지곤 한다.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쓸모가 다한 스키장과 자연을 훼손당한 가리왕산, 그리고 무한한 휴식의 슬로건이 있는 안개 걷힌 리조트의 반대편 뷰가 주는 불편한 진실. 


공간은 그 쓰임에 따라 기획되고 만들어지지만 그 안에는 현재 외에도 미래의 가치가 담겨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어쨌건 다음날 아침에도 눈이 일찍 뜨였다. 또 어제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있었고 복사해서 붙이듯 똑같은 커피를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풍경 속에 마시고 있었다. 푹 쉬러 온 여행이었는 데 있는 동안 내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이 오는 과정을 온전히 맞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던 그 두 번의 방문 기간 동안 나는 어떤 프로젝트 기획과 구상을 했다. 사우나를 간 남편을 두고 혼자 방에서 구름을 보다가, 안개를 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있다, 드문 드문 어떤 생각이 나곤 했다. 풍경이 잘 보이는 객실 책상에 앉아 비치되어있던 작은 메모장과 볼펜에 긁적이며 생각이 정리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워내기만 했을 뿐인데 또 한 장의 메모장에 생각이 채워졌다. 공간에 대한 긴 글을 써보기로 했다.






본 글에서 인용된 공간은 상업적 광고가 아니며 그 어떤 댓가도 없는 온전한 개인적 경험과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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