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꿈꾸는 것이 다르지만 나는 '공간'에 대한 욕심이 조금 더 있는 것 같다. 늘 새롭거나 특별한 곳에 머무는 경험을 좋아했고 그러다 보니 여러 형태의 여행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내가 생활하는 공간을 조금이나마 더 멋진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편이다. 그런 소소한 열망들로 부동산, 이사,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 더욱 커졌다. 일을 하며 브랜딩과 마케팅을 할 때에도 그 브랜드가 표현되는 공간을 어떻게 구현할지, 그 공간이 어떤 의미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편이다.
요즘 좀 더 커진 꿈이 있는데, 정원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이다. 집이 넓어 많은 사람을 초대해서 크게 웃으며 식사를 하고, 마당에 꽃을 키우고 텃밭에서 채소를 따 요리를 할 수 있는 곳. 가끔은 꿈꾸는 집 정원에 구도를 짜고 빈 종이에 그려보기도 한다. 상상속에서 집을 지었다 다시 허물고 다시 짓는다. 구체적으로 공간 계획을 세우고 그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의 한적한 여유로움을 꿈꾼다.
스스로 행복을 선택했던 타샤 튜더
전원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고 평생 그런 삶을 살다 간 동화작가 타샤 튜더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녀는 미국의 버몬트주 어느 숲에 터를 깊이 마련하여 목가적인 삶을 살며 가족 생계를 위해 100여 권의 동화책을 펴낸 동화 작가이다. 타샤 튜더만의 그림, 정원, 집, 식탁, 손으로 만든 인형 등이 책으로 출간되어 그녀의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타샤 튜더가 버몬트주 숲 속에서 광활한 정원을 손으로 일구며 평생 살았던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타샤는 1915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2008년까지 20세기를 살았던 사람이지만 늘 19세기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고 한다. 타샤 튜더의 어머니는 일러스트레이터였는데 작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당시 열 살 정도의 어린 타샤 튜더는 엄마를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대신 엄마 친구 부부 가족들과 함께 전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사실 타샤 튜더가 일찍이 친엄마와 떨어져 시골에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이유에는 타샤 튜더의 출생부터 어린 시절 내내 검게 드리운 가족의 잔혹역사가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원래 재력이 있는 유부남 유부녀였다. 서로 불륜관계였는데 남자의 본처가 이에 상처를 받고 자살한 다음에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 화려하게 삶을 살지만 첫째 아들을 아버지가 직접 만든 요트를 타고 나갔다 잃게 되었고, 둘째 아들은 그로 인해 마음을 다치게 되었다고 한다. 부부는 이런 상황속에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식을 한명 더 낳았는데 그렇게 태어난 막내가 타샤 튜더였다. 자신이 만든 요트로 인해 큰 아들을 잃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다가 타사튜터의 아버지는 결국 이혼을 하였고, 약물 중독과 복잡한 결혼과 이혼 생활을 다시 반복하며 피폐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타샤 튜더도 일찍 결혼해 남편 대신 동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며, 두 번의 이혼을 겪었지만 묵묵히 자식들과 정원을 키워냈다.
한국의 정원, 천리포수목원
태안반도 만리포 해수욕장 근처에 너무 아름다운 수목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국적인 정원 풍경이나 다채로운 꽃들이 이루어내는 색감이 다른 한국의 정원과는 사뭇 달라 이채로운 풍경이었다. 다양한 나무와 꽃이 어우러지는 숲을 여유롭게 산책하며 바다 풍경을 맞이할 수 있었다.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사람은 '민병갈 원장'이라고 한다. 1970년대부터 이 땅을 사들여 수목원 조성을 시작했고 해외의 묘목을 적극적으로 들여와 그가 2002년에 죽기 전까지 한국의 자연과 한국의 섭생에 맞게 정원을 가꾸었다. 수목원을 방문했을 때 받았던 인상은 꽃 품종이나 나무 품종 하나하나 전체 조화를 너무 잘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서로 색이 강렬해서 색상을 서로 방해하는 느낌 없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전체 수목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잘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희귀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천리포수목원은 그 보존가치도 뛰어난 곳이다.
'신의 비밀정원'이라고도 불렸던 천리포수목원이 일반인에게 개방된 것은 2009년이었다. 원래 식물 연구나 후원사만 출입할 수 있었는데 관리비용이나 직원 월급 등 전체 운영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져 일반인 공개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
민병갈 원장은 미 해군 장교로 1945년 한국에 온 칼 페리스 밀러라는 미국 사람이었다. 아마도 '칼','밀러'라는 본명과 비슷한 발음의 '민병갈'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은것이 아닐까 싶다. 칼 페리스 밀러는 한국의 자연 풍경에 끌려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고한다. 귀화한 외국인이 한국의 자연 풍경에 외국의 새로운 식물과 원예 품종을 접목하여 하나씩 심고 가꾸어간 정원이 40여 년을 거쳐 아름다운 수목원이 된 것이다.
개방 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수목원이 일부 몸살이 앓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한 것은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소수가 즐기는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공간을 열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타샤 튜더 할머니가 평생에 걸쳐 가꾼 정원과 직접 집을 짓고 목가적인 삶을 살았던 그 곳은 이제 여러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가 가꾸고 채워나가고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일반인 방문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삶의 공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단하지만 자급자족하는 삶을 통해 불편함을 능히 감수하며 실천해 간 자연 중심적인 삶이 지금 우리가 잃어가는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색의 정원, 그리스 호케포스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학파가 세운 공동체 이름이 호케포스이다. 당시에는 귀족 남자만 시민의 자격을 가지고 모여 토론했다면, 호케포스에서는 자유롭게 신분을 뛰어넘어 정원에 모여 자유롭게 철학을 사유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정치적 토론에 집중한 스토아학파와 반대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개인의 삶과 행복에 더 집중하였다. 쾌락주의라는 단어로 여러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은 관능적인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출발한 철학이다. 그래서 활발한 정치 참여 대신 은둔형에 좀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고민하던 인간의 '행복', '평온한 안정감', ' 고통이 없는 상태'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질문이다.
나의 행복의 원천과 평온한 상태는 '맛있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이다. 강화마루 바닥으로 인해 위, 아랫집 서로 층간 소음이 있는 빌라에 살다 보니 가끔은 손님을 초대하기 전에 많이 망설이게 된다. 그러다 미루고 미룬 다음에 손님을 초대해 놓고도 간혹 여려명우 목소리가 겹쳐 너무 커지면 이웃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내가 꿈꾸는 독립된 집과 작은 정원은 내가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들과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함께 식사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란다. 큰 바람은 아니지만 이 바람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도시 생활 근로자는 오늘도 나만의 정원을 그리고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