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상자에 담긴 것은 침대 매트리스다. 박스 안에 침대 매트리스를 넣어 판매할 수 있도록 스프링을 없애고 메모리폼과 라텍스로 본체만 만들어 압축 포장 기술을 적용, 택배사에서 간편하게 배송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스타급 스타트업 기업인 캐스퍼는 전통적인 매트리스의 비싼 운임과 고가 정책, 직접 들고 계단으로 오르기에도 버거운 불편함을 개선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싱글 매트리스를 기숙사 소형 냉장고 사이즈로 압축하면서 100% 온라인 판매만을 통해 전시 매장 운영 비용과 중간 유통 마진을 낮추었다. 그리고 자체 물류 트럭이 아닌 외부 택배사 UPS 배송을 통해 1/10 수준으로 줄일 수 있었다. 또한 자전거로도 근거리 배송과 집 앞에 놓아둔 택배박스로 퇴근 후 혼자서 간단히 옮기고 비닐을 뜯기만 하면 공기가 차오르면서 바닥이나 침대 어디든 쉽게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배송 비용과 절차가 간단해지면서 100일 체험 및 반품 서비스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한 포장으로 가격 혁신
박스안에 매트리스를 포장하여 판매하는 Mattress in a box 모델을 처음 시장에 소개한 것은 캐스퍼가 아니었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 두 명이 만든 터프트앤니들(Turft & Needle)이라는 회사였다. 한국인 박대희 씨가 제이티 마리노와 공동 대표로 캐스퍼 보다 2년 앞선 2012년에 박스에 담긴 매트리스를 판매하면서 기존 전통적인 매트리스 업계의 유통 구조를 투명하게 바꾸려는 노력을 제일 먼저 시작하였다. 현재는 수십 개의 유사 브랜드가 생긴 온라인 매트리스 시장에서 경쟁을 앞다투고 있으며 터프트앤니들은 현재 썰타 시몬스(Serta Simmons)에 합병되면서 성공적으로 Exit 하였다고 한다.
온라인 매트리스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한 캐스퍼는 2014년 창업 한 달 만에 백만 불(약 11억 9천만원) 매출을 올렸고 벤처캐피털로부터 7천만 불(약 835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그리고 창업 2년 만에 2억 불(약 2,386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고속 성장했고 2017년 기준 기업가치가 7억 5천 불(약 8,950억원)에 달했다.
고객의 체험을 위한 낮잠 투어
캐스퍼는 체험 매장을 운영하지 않는 온라인 전용 정책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재미있는 체험 이벤트를 기획하였다. 이른바 낮잠 투어(Nap Tour)였다. 트레일러에 4개의 작은 방처럼 꾸며진 이동형 체험관에서 매트리스 위에 직접 누워서 낮잠을 잘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실제 여기서 숙면을 취하는 고객이 많지 않았지만 온라인 브랜드 특유의 가볍고 재미있는 기획으로 고객의 체험과 구매를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었다. 한번 누워보고 몸을 뒤척여 가며 매트리스의 사용감을 직접 느껴보는 고객이 많았다. 그리고 이동형 낮잠 버스가 어느 도시를 방문하는지 미리 알려줌으로써 고객과 소통하며 즐거운 오프라인 체험 이벤트를 진행하였다.
후발주자의 성장을 위한 저가 시장 발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클레이튼 크리슨텐슨(Clayton Christensen) 교수가 펼친 파괴적 혁신을 이루는 2가지 요소중 하나는 로엔드(Low-end disruptive), 즉 저비용 모델이다. 초과 만족 고객이란 기술의 발전으로 필요 이상의 복잡한 초과 기능을 자기 만족감 없이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높은 가격에 구매하며 사용하고 있는 고객을 일컫는다. 우리가 필요이상의 초과 만족 고객으로 포지셔닝 되어 지면 그들로 인해 형성된 주류시장은 고액 매출과 직결되는 메인 스트림에 놓인 고객뿐만 아니라 하부시장을 위해 더 단순하고 혁신적인 제품을 기획할 여력이 사라진다.
가격 혁신을 통한 로엔드 시장 진입은 상대적으로 외면된 고객 대상으로 저 비용 모델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발 빠르게 시장에 진입하고 파괴적 성장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파괴적 저가 모델로 진입하여 치고 올라가는 전략을 낮은 곳에 발을 딛고 들어선다는 의미로 저가 시장 발판(Low-end footholds)이라고도 한다.
단순한 선택과 가격
캐스퍼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닐 패리스는 매트리스 매장을 방문했을 때 복잡한 기능 설명을 한참이나 듣고서 그 안에서 200~300만 원대의 매트리스를 골라야 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마 독자들 중에서도 매장 직원의 30여분에 걸친 설명에 끄덕 끄덕 하며 영혼 없이 듣고 있었던 경험이 있을것이다. 닐 패리스도 매트리스 매장에서 많은 설명 중 몇 개 미처 다 알아듣지 못하는 기능 설명을 듣고 덜컥 중고차를 구입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침대는 과학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프링 디자인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 열 보존 기술, 체형 저장 메모리 등등 매트리스의 기술과 기능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수록 더욱 선택이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매트리스는 10년에 한 번 꼴로 새로 구매하거나 교체한다고 한다. 숙면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몇 해 전 매트리스만은 가장 돈을 아끼지 않고 매장에서 제일 좋은 제품으로 골랐던 적이 있다. 사실 그때 구매 기준은 광고나 다른 매체에서 자주 접해서 익숙한 이름의 브랜드였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캐스퍼는 매트리스를 구매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에서 착안하여 설문 조사를 통해 고객들의 구매를 결정하는 핵심 기능을 단순하게 정리하였다. 등을 편안하게 받쳐 줄 것, 공기 순환이 잘 되어 시원할 것이었다. 수면 전문 의사였던 공동 창업자 필리 크림의 아버지의 조언과 8개월간의 매트리스 실험을 통해 지금의 메모리폼과 라텍스를 결합한 제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가격에 대한 고객들의 의견을 조사해 본 결과 보통 일반 매트리스 가격이 평균$2,500 사이라면 $500~1,000대의 매트리스 가격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퀸 사이즈 매트리스도 최대 $1,000이 넘지 않도록 불필요한 유통과 비용을 줄이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가격만 저가인 모델은 오래가지 못한다.
후발 진입 기업의 파괴적 성장을 위해 저가 시장을 공략한다고 해서 혁신 없이 이루어진 저가 전략은 오래가지 않는다. 저가 전략으로 진입 후 다시 가격만 올리는 것은 혁신이 아니며 지속적 성장을 이뤄낼 수 없다. 몇 해전에 등장한 저가 생과일 주스 프랜차이즈 브랜드는 천 원대 제품 가격으로 오피스, 주택, 상가 밀집 지역에 빠른 속도로 매장을 확대했다. 하지만 그 후 점점 가격을 올렸고 최근에는 부동산, 운영비 등을 이유로 33% 인상을 단행했다. 2~3천 원대 메뉴가 주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매장 인테리어와 관리는 점점 후줄근해지고 고객으로서 나의 만족도는 떨어지고 있다. 가격 인상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제품이나 체감할 만한 서비스 업그레이드 없이 제품 가격만 올라갔다고 느낄 수 도 있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입장에서는 지속적 운영과 성장을 받쳐주지 못하는 단기간의 저가 정책일 수 있다.
혁신을 통한 저가 전략을 만들어야 기업, 고객, 생산자 모두 오래갈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