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인아 Nov 10. 2022

두 유 노우 K-그래픽 디자인?

'토속'도 '외국물'도 아닌 어떤 빼어남을 찾아서

디자인 탈식민화 담론을 접하곤 기쁨과 충격에 앓아누웠다. 나는 이 ‘선진’ 담론에 매료되어 다양한 글과 자료를 탐구하며 몇 번의 겨울을 보냈다. 내가 이 담론에 매료된 이유는 단순했다. 드디어, 언어를 찾은 것 같았다. 좋은 일이라곤 잘 일어나지 않는 내 삶에 공부는 큰 활력이 되어주었다. 동시에 ‘한국에서 디자인 탈식민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라는 질문이 계속 나를 외롭게 했다. 그러다 같은 질문을 영어로 듣게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한국에서 디자인 탈식민화를 이야기하건 말건, 이 담론은 이미 이곳에 도착했다. 그것도, 식민주의적으로. 


최근 들어 ‘해외’(라고 쓰고 유럽 혹은 영미권이라 읽는다) 매체나 블로그에 소개되는 한국 디자이너가 굉장히 많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가끔은 나도 몰랐던 이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김’이아니라 ‘킴’, ‘박’이 아니라 ‘팍’, ‘최’가 아니라 ‘초이’로 이름을 읽으며 기사를 클릭한다. 디자인 블로그에서, 인스타그램에서, 비헨스에서, 핀터레스트 어디선가 봤던 라틴이 돋보이는 과감하고 힙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여기, 한글은 없거나 고작 자막정도의 역할을 한다. 한글이 메인으로 쓰였다면 레터링 작업일 확률이 높다. 그건 글자라기보단 그림처럼 어떤 질감이나 분위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작업이 뉴욕에서 만들어졌건, 베를린에서 만들어졌건, 서울에서 만들어졌건 상관없어 보인다. ‘서울의 디자이너’라는 사람들이 사는 어떤 가상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의 탈식민화 담론에 환호하면서도, ‘서구’에서 어떻게 한국 디자이너들이 인용되는지, 또 그것이 역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보는 일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나는 자꾸 “한국문화가 뭐지?”라는 질문으로 미끄러진다. 그리고 이에 대해 말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왜냐면 ‘한국 문화’를 떠올리면 나에게 두 가지 선택지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는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의 유산을 지키고자 헌신한다. 그는 묵묵히 전통을 이어가는 무형문화재 장인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고집 센 구식 꼰대이기도 하다. 내 머릿속에 이 구식 꼰대는 ‘암탉이 울고 있는 여성부 해체하라’는 피켓을 들고 호주제 폐지를 반대했던 한복차림의 노인이다. 디자인으로 치면 캘리그래피를 활용했던 2000년대 초반 어떤 디자인 스타일이 떠오른다. 


둘째는 ‘끝내 이겨낸’ 이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며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인다. 이들은 전통적 특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한국인의 피만 흐른다면,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그러니 여기서 핵심은 ‘세계’(라고 쓰고 다시 유럽 혹은 영미권이라 읽는다)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BTS, 봉준호가 이쪽에 속한다. 디자인으로 치면 iF 어워드 같은 것을 타는 것이 될 수 있겠다. 해외 매체에 소개되는 것도 이쪽에 해당한다. 


나의 어머니는 후자를 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15살인 딸이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길 바라며 호주로 조기유학을 보냈다. 덕분에 서울에 가는 게 최대 꿈이었던 내 세상이 세계로(!) 넓어졌다. 그렇게 성장기의 주요한 시기를 ‘서구 사회'에서 ‘선진 교육'을 받으며 알게 된 건, 경쟁에 유리한 특권층은 ‘뿌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영어를 배운다고, 디자인 ‘실력’을 늘린다고, 겉으로 백인처럼 행동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게 나의 포부였다.


하지만 내가 뿌리를 내릴 자리를 찾아 애써볼수록, 그러니까 ‘한국 문화’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여기서만 할 수 있는 디자인이 뭔지 파고들수록 그건 모래처럼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디자인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곳에서도, 서구중심적이다. 한국에서도 바우하우스를 기념하고,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미국, 일본 등 해외의 ‘선진’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탐독한다. 한국에서 ‘좋은 디자인’은 좀체 일상에서 누리기 어려운 것이다. 모두가 경멸하는 ‘체리 몰딩’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좋은 디자인은 선진국에 존재한다. 문제는 내가 디자인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이다. 나는 디자인이 서구중심적이라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일상에서 보는 모든 게 지겹고 싫었다. 15살 때 혼자 외국으로 나가라는 제안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한 이유다. 사람들은 이 한국의 고유한 정서라고 한다. 나는 자기혐오가 더 맞는 것 아닌가 싶다. 한은 모르겠지만 나처럼 고향을 떠나 서울로, ‘헬조선’을 떠나 해외로 나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흔하다. 자기혐오는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디자인서울'을 앞세워 서울시가 밀어버린 ‘우악스런’ 간판들을 생각하면 그렇다. 재개발만이 희망이고,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속화되고, 모든 것이 서울을 중심으로 흐르는 이곳엔 내가 찾는 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근대미술사 연구자 서유리는 ‘시대의 얼굴: 잡지 표지로 보는 근대’(2016)에서 ‘모던’ 디자인이 한국에 도착했던 20세기 초반의 모습을 다룬다. 1900년대 초반 조선의 엘리트들은 계몽을 통한 새로운 근대 조선인의 자아 형성만이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식민지화를 막고자하는 간절함에 ‘서구열강’처럼 제국주의자가 되고 싶어 했다. (조선의 왕은 곧 제국을선포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여성이 전체 인구의 1~2%에 불과했던 시절이기에, 이들을 계몽해야만 한다는 열망을 담아 발행된 여성지는 이미지가 중요했다. 그렇게 여성지는 당대 최신의 디자인 트렌드와 화려한 기술이 집약적으로 구현된 매체가 되었다. 


서유리에 따르면 이들 잡지에서 여성은 이분법적으로 재현되었다. 딸을 유학 보냈던 나의 어머니처럼, 조선의 엘리트들은 여성에게 모던걸이 되어 ‘근대를 몸에 새길’ 것을 요구했다. ‘근대’는 ‘서구’를 뜻했다. 모던걸은 서양식 펌을 하고, 서양식 옷을 입고, ‘양’산을 쓰고, 산보를 나간다. 그는 책을 읽고, 종종 사색에 잠긴다. 반면, 조선 여자는 버리고 극복해야 할 현실이었다. 그들은 더럽고, 집에만 갇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지하며, 지식보다는 미신을 믿는 자들이었다. 근대를 몸에 새긴 모던걸을 재현하는데, 서구와 일본의 최신 트랜드의 그래픽을 차용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서구식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이나 인쇄 기술이 없었던 곳에서, 일제의 검열을 피해 만들어진 잡지다 보니 만듦새가 조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 시대엔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걸 부정하거나 폄하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자꾸 동일시하게 된다. 100년이 지났지만 유효함을 느낀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앞서 묘사한 ‘킴’, ‘팍’, ‘초이’가 소비되는 방식이 문제적이라 느낀다. 그들이 그런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면 그편이 해외의 매체에 포섭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는 윈-윈 게임이다. 해외에서는 이 디자인을 소개하며 자신들이 동아시아의 디자인까지 포용하고 소개하는 ‘글로벌’ 매체임을 뽐낼 수 있고, 역으로 이 ‘소개’들은 한국에서 ‘글로벌 북반구의 인정을 받은’ 품질보증서가 된다. 문제는 그들의 디자인이 어떠한 한국적 맥락에서 유래한 것인지, 혹은 한국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내가 아는 건 이렇다. 적어도 한국 디자이너들은 ‘그런 디자인으로 어떻게 클라이언트의 컨펌을 받아냈는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답은 단순하다. 컨펌은 어렵지 않았다. 왜냐면 소개되는 대부분의 작업이 개인적 실험이라거나, 전시 참여작이거나, 문화예술계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엘리트 집단의 인정이다. 


이 현상은 우리 일상에 흔히 보이는 디자인을 디자인 바깥으로 밀어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렇게 내가 아는 많은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하는 디자인은 디자인이 아니라며 괴로워한다. 젊은 디자이너들은 이제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을 쪼개 또 실험적인 자기 작업을 하며 ‘디자이너’ 이미지에 맞춰 자신을 퍼스널 브랜딩을 하는 것이 성공하기 위한 길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모두 번아웃과 완벽주의에 시달리며 불안을 동력으로 움직인다. 이건 어떻게 봐도 건강한 환경이 아니다.


이건 딱히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해에 처음으로 궁금해했던 것이, ‘왜 많은 수의 디자인 스튜디오 사이트가 영어로만 이뤄져 있는지’였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나는 점점 더 많은 ‘국적이 모호한’ 한국 디자인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논픽션이, 템버린즈가 한국 브랜드인 줄 몰랐다. 시몬스코리아는 미국(백)인의 삶이라는 판타지를 팔며, 백인과 영어를 내세운다. 심지어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라는 오랜 캐치프레이즈까지 영어 네이티브인 성우가 어색한 발음으로 읽는다. 일부러 어색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디 브랜드도 SNS에 자주 보인다. 이것이 한국 디자이너의 일상이라면 일상이다. 그러니 나는 딱히 이들에게 대한 사람 대한으로 아름다운 한글을 길이 보전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고 윽박지를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 저게 트렌드구나’, ‘나는 저렇게 디자인하고 싶지 않은데 돈을 어떻게 벌지?’ 생각하고 만다. 그러다 한번은 포트폴리오 크리틱에 참여해 한글이 없는 포트폴리오를 보고 ‘고용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글 타이포그래피 능력이 궁금할테니 넣으면 좋겠다’고 피드백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왜냐면 뒤늦게 ‘그 디자인 잘하던 학생은 한글 타이포그래피 능력을 궁금해하지 않을 곳에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아차 싶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자발적 디자인 식민화?


디자인 탈식민화 담론이 한국에 ‘수입’된다면? 그건 식민화일까 탈식민화일까? 나는 탈식민 담론을 즐겁게 읽지만, 이 글들을 영어로 읽어야 함에 불편함을 느낀다. 내가 읽는 사례들은 모두 유럽과 미국의 예다. 한번은 미국의 유명한 디자인 대학에서 한국의 페미니스트 디자인을 주제로 하는 행사에 패널로 참여하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 앞서 말했듯, 윈-윈 게임 아닌가? 그런데 Q&A 세션에서 ‘한국의 디자인 탈식민화 담론의 현주소’와 ‘한국 관련 자료는 어디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 순간, 내 모든 호의가 증발해버렸다. 왜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도 님들이 편히 볼 수 있게 영어로 된 자료를 만들기까지 하면서? 탈식민화를 이야기하는 미국중심적 질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한국의 상황이 궁금하면 한국어를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내가 했던 많은 말 중에 그 말만은 통역되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았는지 채팅창에 모인 이들이 자신이 아는 영어로 된 자료들을 공유했다. 그렇다. 그렇게 애써 찾지 않으셔도 되도록 한국인들은 알아서 한국어와 영어가 병기된 자료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앞서 내가 영어로 소개된 한국 디자인 씬의 모습이 가상 세계 같다고 말한 것처럼, 매우 일부만이 번역될 권리를 얻지만 말이다) ⟨그래픽⟩지도 그중 하나다. 앞서 언급한 글로벌 플랫폼 외에 한국 디자인을 ‘해외’에 알린 매체 중 하나가 ⟨그래픽⟩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나도 호주에서 ⟨그래픽⟩을 보며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들에 대해 알게되었다. ⟨그래픽⟩은 한국의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하기도 했지만, 해외의 ‘최신’ 디자인을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 역시 했다. 그러면서 그 둘의 위상을 맞추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가장 재밌다고 느끼는 이슈는 학교를 다룬 이슈들이다. ⟨그래픽⟩은 한국의 홍익대학교나, 서울대학교는 다루지 않는다. 베르크플라츠 티포흐라피, 예일, 헤릿 리트벨트 아카데미는 다룬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100년전 조선의 엘리트들을 떠올리며, ⟨그래픽⟩이 굉장히 한국적이라고 느낀다. 


최근 이 중에서도 예일 특집호가 한국은 젊은 다꾸러들에게 예기치 못한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예일 특집호를 다꾸 재료로 추천하며 (수입 잡지와 비교해) ⟨그래픽⟩이 매우 저렴하다는 점, 예쁜 이미지가 많다는 점, 그리고 영어가 많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이들에게 ⟨그래픽⟩은 다꾸에 최적화된 훌륭한 재료였다. 


나는 이들의 구매 후기와 영상이 너무 좋았다. 내가 학부생 시절 열심히 읽던 이 잡지를 이들이 과감하게 찢고 자르고 콜라주하여 다이어리를 꾸미는 영상을 보면서 해방감에 소리를 질렀다. 어느 서구 디자이너의 작업 위에 하트 모양의 ‘Love me Tender’ 스티커를 붙이는 장면의 쾌감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이들이 그래픽 디자인계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그들은 정말 아무 상관이 없기에, 또 가장 정확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우리가 만드는 건 결국 그저 ‘예쁜’ 이미지다. 한국인의 작업은 저렴한 대안이다.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라면 한국의 대기업은 왜 중요하고 예산이 큰 프로젝트에 결국 백인 디자이너를 고용하는가?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이 다꾸러들의 반응을 (계몽해야 발전한다는 실패로 돌아간 관념을 억누르고) 숙고해야만 하는 비판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다시, 개화기 조선으로 돌아가 보자. 잡지에 재현된 여성상은 엘리트 (남성)이 제시한 것이었다. 서구의 것이었다. 독자들의 반응은 독자 의견란을 통해 제한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을 따름이다. 당대의 여성들은 진짜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잡지가 포섭하지 못한, 끝내 글을 몰랐을 대다수의 여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더 나아가, 그 당시 퀴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국에 기반을 둔 디자이너로서 ‘한국 문화’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자꾸 함정에 빠지는 기분이 드는 나는 왠지 개화기 조선 여성의 마음을 조금을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건 내 앞에 두 가지 극과 극처럼 보이는 이분법적 옵션만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테다. 나는 그 둘 다 아닌데, ‘해외'의 선생님들은 나에게 얼른 ‘한국’이 무엇인지 간편하게 요약해주길 요구한다. 그것이 이제껏 한국이 ‘세계사'에서 가졌던 위상일 테니 말이다. 그 정도 채우는 일은 어렵지 않으니까?


처음에 나는 이 미궁 속에서 내가 찾는 건 아마도 그 이분법적 스펙트럼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찾는 건 아마도 그 둘 아예 바깥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픽⟩에 대해 디자인계 ‘바깥’의 다꾸러들이 말해주듯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더 막막한 기분에 휩싸인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있을까? 벌써 한국에서도 디자인 탈식민화 논의가 미국처럼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믿는 세상이 내 대답을 기다려줄 수 있을까?



이 글은 미국그래픽아트협회(AIGA)의 의뢰를 받아 올해 7월에 작성되었습니다. 전문 번역가의 영역을 거친 원고는 https://eyeondesign.aiga.org/ 웹진에 게재 될 예정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로운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려고 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