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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희원 Jun 14. 2022

새로운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려고 해요

2022년 오늘의 풍경이 시도 중인 것

이 글은 지난번 글에 썼던 이 생각으로부터 이어진 실천에 대한 글이다.

보아하니 디자인이라는 일은 기획과 아이디어, 콘텐츠, 제작과 구현까지의 일련의 복잡한 프로세스 속에 존재한다. 기획 없이는 디자인이 될 수 없고, 디자인했다고 그대로 구현되지 않는다. 즉, 디자인은 다른 작업에 의존해야 성립되는 일이고, 그러니까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고립과 착취의 위험에 놓이기 쉽다는 뜻이다. (돌보는 디자인, 2022-01-19)

위에 적은 바와 같이 디자인 스튜디오의 일은 보통 일의 가운데나 마무리 단계에 있다. 클라이언트 사에서 기획과 콘텐츠를 정리하여 외주를 맡기면 디자이너는 기한 내에 결과물을 납품한다. "기획 → 콘텐츠 → 디자인 → 완성"이라는 이 일의 순서는 너무나 익숙하고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두 주체가 협업할 때 절대로 매끈하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당탕탕 클라이언트-디자이너 협업 프로세스 ⓒ오늘의 풍경

특히 예산이 적고 인력이 부족할수록 충돌과 껄끄러움은 더 잦게 일어난다. 프로젝트는 때로 총괄 담당자(근데 이제 '상사'라는 의사결정자를 곁들인) 없이, 작가나 에디터 없이, 이미지 리소스 제작자 없이 진행된다. 그 틈은 대체로 프로젝트 담당자와 디자이너가 어찌어찌 해결한다. 어찌어찌 일의 마지막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어찌어찌 밤을 새우고 서로 무리한 부탁을 해가며 "최종_진짜최종_마지막_이걸로바꿔주세요" 파일을 만들어 낸다.


상호돌봄의 디자인 협업 모델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프로세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창작열을 불태우며 야근하고 '통과' 피드백을 받은 뒤 뿌듯해하는 노동자의 판타지 같은 건 작동을 멈춘 지 오래고, 신세한탄은 힘만 빠지는데, '갑'의 자리를 차지하는 시나리오도 탐탁지 않다. 다 마음에 안 드니 어쩌나. 일단 우리(신인아 디자이너와 에디터인 나)는 다른 방식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보기로 했다. 몇 번의 회의를 통해 거창하지만 일단 "mutual-aid"라는 개념을 빌어 "상호 돌봄의 디자인 협업 프로세스"라 이름을 붙인 협력 모델을 만들었다. 협력사와 디자인 스튜디오가 공동의 목표 하에 기획하고 협업하여 결과물을 만들고 학습하는 원형 프로세스였다.

우리가 제안한 협력 모델 ⓒ오늘의 풍경

우리는 이런 협업 모델이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비영리 조직들과의 작업에서 적합하리라고 생각했다. 지난 프로젝트들을 돌이켜 봤을 때 비영리 조직들이 상대적으로 '외주'보다 더 '협업'하는 데 익숙하고, 예산과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존 프로세스의 문제를 돌파할 해결 방법을 필요로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뭐가 이득일까? 일단 일의 과정에서 작업자가 배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프로젝트를 해나가다 보면 상호 맥락과 신뢰를 쌓아가면서 장기적으로 쾌적한 파트너십을 만들 수 있다. 불확실한 환경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들에게 예측 가능한 일감은 중요하다.


개념은 잡았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처음 시도해보는 방식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렇게 대화하고, 실험하고, 실패를 포용하고 학습하려면 늘 쫓기듯 주어지는 프로젝트 마감 기한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오늘의 풍경은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3월에 기존의 몇몇 클라이언트에게 우리의 고민을 설명하고 새로운 실험을 제안하는 메일을 보냈다. 다행히 우리의 용감한 파트너들은 모호하고 결과물도 불확실한 데다가 시간도 들여야 하는 협력 제안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먼저 이런 고민을 건네주어 고맙다는 피드백도 있었다.


함께 헤매는 과정

그래서 올해는 '일방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무리'를 하지 않기 위해 '함께 합의한 무리'를 해보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프로젝트 시작 전에 파트너와 지난 협업 과정을 회고하고, 각자 평소 일하는 방식과 의사결정 구조를 공유하고, 서로 염려되는 점을 나누고, 그라운드 룰을 만들고, 매니징 업무를 분담하고, 온라인 협업 툴을 함께 정했다. 예산에 대해서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서로 물어가며 3개월이 지난 지금 각 프로젝트들은 당연하게도 서로 다른 리듬과 방향으로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큰 합의 기반을 만드는 초반의 대화는 대체로 아름답고 따뜻했지만 이 '협업'은 아무튼 분명히 '거래'에 기반한 작업이기 때문에 약간은 긴장되는 순간들도 당연히 있다. 협업의 범위와 상도 다르고, 서로의 사정도 완벽히 알 수 없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일단 상호-돌봄의 관계를 믿어보고 시작하는 프로젝트에서는 매끄럽지 못한 지점들이 이면의 균열로 번지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때그때 함께 장해물을 치우거나 매듭을 푸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런 작업에 너무 많은 시간이 투입되어야 한다면 역시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신뢰가 깨지진 않을 것 같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사실 나는 일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는 관성이 있는 편이라 문제를 덮고 지나가지 않고 솔직하게 의견을 공유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 말을 하면 혹시 누군가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건 아닐까?' 눈치를 보는 마음이 고개를 들 수록 더 입 밖으로 꺼낸다. 그 정도의 생각이 드는 문제가 있다면 함께 나누고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은 여기밖에 없으니까. 이처럼 '내가 맡은 부분은 어떻게든 책임지고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함께 일에 대한 몰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내게도 새로운 경험이다.


인풋을 설계하는 일

그래서일까? 얼마 전엔 좀 낯선 일의 감각을 느끼기도 했다. 프로젝트를 아웃풋 중심으로 계획하고 일을 인지하는 게 아니라 인풋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달까? 전자가 '내일까지 결과물을 만들어야 해'라면 후자는 '오늘 이걸 하면 목표에 다가갈 수 있겠지?'에 가깝다. 필요한 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낙관에 근거한 여유다.


주니어 시절에는 긴장감과 아드레날린을 연료 삼아 일하며 빠르게 체크리스트를 지우는 데서 유능감을 느꼈었다. 해결사를 자처하고 쉴 틈 없는 타임라인 속 어디 한 구석 펑크가 나지 않게 체크리스트를 착착 지워나갔다. 흠 잡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 나는 꽤 협조적인 동료였지만 어떤 의미에선 닫혀있었다. 일의 환경이 달라진 지금까지도 그때 배운 것들, 획득한 기술들이 어느 정도 '일하는 감각'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 건 '우리'의 일이 좋은 경험, 좋은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장기적 관점과 원칙에서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이고, 오늘 필요한 인풋은 무엇인지 그걸 위해 아웃풋은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것이다.


2022년 상반기가 끝나간다. 오늘의 풍경과 파트너들은 서로에 대해, 목표에 대해 인풋을 쌓아가며 각자의 체크리스트보다는 큰 공동의 풀(Pool)을 조성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예산과 인력 수준에서 나올 수 있는 아웃풋에 비해서 너무 큰 풀을 만들고 있는지도? 좀 비효율적인 작업 방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풀 자체가 우리가 쌓고 있는 어떤 자본이고, 여기서 다음 스텝을 생산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웃풋의 시간이 다가오면 또 어떨지 솔직히 장담할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가 맞이할 것은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일 테니까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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