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풍경 일곱 번째 생일에 부쳐
오늘의풍경(이하 ‘오풍’)에 에디터라는 역할로 합류한 지 네 달이 되었다. 네 달 간 작업실에서 지켜본 바 오풍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인 신인아는 디자인 말고도 많은 일을 한다. 근데 원래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 디자인 이상의 일인 것 같다. 보아하니 디자인이라는 일은 기획과 아이디어, 콘텐츠, 제작과 구현까지의 일련의 복잡한 프로세스 속에 존재한다. 기획 없이는 디자인이 될 수 없고, 디자인했다고 그대로 구현되지 않는다. 즉, 디자인은 다른 작업에 의존해야 성립되는 일이고, 그러니까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고립과 착취의 위험에 놓이기 쉽다는 뜻이다. 만약 그가 ‘디자이너의 일’을 협소하게 정의하면 전체 프로세스의 맥락에서 배제되거나 도구화되어버리기 십상이고(이해할 수 없는 콘텐츠로 디자인하기), 또 ‘디자이너의 역할’을 넓게 보고 업무 프로세스와 함께 가면 보상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일에 개입하며 자기착취를 하게 되어버릴 수 있다.
그리고 오풍은 그보다도 좀 더 복잡하게 다양한 일을 하는 것 같다.
S#1. 경성빌딩 5층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풍경 작업실에 또 해외 서적이 도착했다.
표지를 펼치자 보이는 서문의 첫 번째 문장: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윤리적인 그래픽 디자인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 Desmond Wong, Designer
자본주의 시장에서 제법 열심히 살아남아 온 오풍은 왜 매일매일 자아분열의 질문을 읽는 걸까? 그건 아마 오풍이 모순적인 디자인 산업 안에서 일하면서, 그 모순을 그대로 수용하고 재생산하지 않기 위한 실천을 찾아나가기 위해 해 온 일이 꾸준히 그 모순들을 가로지르는 주제들로 관점을 갱신하는 일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어떤 모순들은 명확하다. “왜 여성 디자이너는 업계에서 사라지는가?”처럼. 하지만 어떤 모순들은 그보다 복잡하다. 디자인 업계의 미소지니를 넘어, 디자인이라는 일 자체에 내포된 착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미 기울어진 세계의 질서 위에서 더 효율적으로 더 자기 자신을 위하며 더 영리하게 일할 수록 어딘가 납득할 수 없는 틈을 자꾸 발견하게 되는.
오풍이 복잡하고 다양하게 일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로 성숙해 온 건 이런 까닭이다. 유체이탈형 회피를 하지 않는 이상, 내가 속한 세계의 모순을 짚는 글은 나의 모순도 겨눈다. 이를 수용함으로써 흩어진 관점들을 재구성하고 다시 엮어서 공동의 현실로, 즉 자신의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오풍은 기획하고, 조직하고, 글을 쓰는 일들을 해왔다.(언제나 유머와 가벼움을 섞어서) 그 일들은 오풍의 대표인 신인아가 디자이너이기에 한 일이지만, 그 이전에 그냥 시민이고 사회 구성원이라서 한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될 수 있을까? 적어도 오풍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마 디자이너가 아니었어도 그는 자기 자리에서 그런 일들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우연과 의지에 따라 디자이너가 되었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와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 디자인은 컨텐츠에 종속되는 업무 프로세스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기 마련인 ‘회사’를 나와 ‘오늘의풍경’이라는 독립 스튜디오를 만들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겠지?
오풍에서 일하게 된 지는 네 달이지만, 디자이너이자 기획자인 신인아를 협업자로 바라봐 온 지는 5년 쯤? 우리는 관심과 책임과 응원과 업무와 기대가 여차저차 섞여 있는 조금 난잡한(messy) 우정의 고용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일을 막 시작했던 때에는 대단히 기능적으로 오풍에서 나의 역할을 정의해보려고 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감각으로 일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풍경의 일원이자,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으로써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일련의 복잡한 프로세스 속에 존재하고, 다른 작업들, 그리고 도구들, 제작자들, 의사결정자들과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고립과 착취의 상황에 처하기도 쉽지만 또 반대로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디자이너는 제작물의 의사결정자로서, 메시지의 첫 인상을 결정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또 발언권을 가진 전문가로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 요즘 세상에는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에 디자인이 임하고 있기에 그 영향력은 더 멀리 퍼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 때문에 디자인 노동은 돌봄 노동과 유사한 모순에 처하기도 하는 것 같다. 모든 곳에 필요하기 때문에 신격화 되면서도 동시에 하찮게 후려침 당한달까. 시각 디자인 고유의 원리 원칙을 정립하고, 전문성을 강화하는 일은 디자인의 권위를 세우며 이런 후려침에 맞서는 힘을 만들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디자이너’가 세상 모든 것의 디자인과는 단절되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그 전문성과 원리 원칙이 결국 ‘디자인’이란 단어와 개념이 출발한 곳을 계속 다시 불러온다면)
그러니까 디자이너의 목소리로, 디자인이라는 일이 이 세상을 얼마나 많이 돌봐왔는지, 사람들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더 많이 발견되고, 더 자주 긍정되었으면 좋겠다! 출판이나 IT 외에도 더 다양한 업계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되고,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뜻밖의 협업을 만들고, 일의 더 넓은 범위에 개입하고, 그만큼의 기여가 충분히 인정되는 계약을 맺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렇게 난잡한 매일매일의 풍경 속에서 디자인이 만들어지고 더 괜찮은 내일의 풍경을 볼 수 있기를. 스튜디오 오늘의 풍경이 77번째 생일을 축하할 때까지?
S#77. 할머니-시민-디자이너와 그 친구들
다양한 실루엣 여럿이 함께 축하하고 있다.
모두의 웃음 소리.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이 꼭 함께 읽어줬으면 하는 참고문헌
[아티클] “Does Design Care?”, Cherry-Ann Davis, Nina Paim (Futerss)
[도서]『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 더 케어 콜렉티브, 정소영 역(니케북스, 2021)
[전시자료] "그리고 우리는 난잡한 변두리에서 의미를 움켜쥐었다: 페미니스트 디자이너의 역사학" 자료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