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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상출구 Nov 05. 2022

삶의 국경 너머로

도주와 전진 사이의 <델마와 루이스>

여자의 삶과 권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관성적으로 페미니즘(여성주의)이라는 용어 안에 가둬버리는 태도는 환영하기 어렵다. 그런 분류는 “여자들은 이쪽으로”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한 이야기라고 페미니즘이라는 특정 구역으로 몰아넣고 하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봐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렇게 해서는 이야기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다양한 의미를 발산하지도 못한다. 여자의 삶과 권리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장르로 분류되기 전에 한 인간의 개별적 삶과 보편적 권리에 관한 이야기로 읽히는 것이 옳다. 남자의 삶과 권리에 관한 이야기를 특별히 한 장르로 구별하지 않는데 여자의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굳이 성별을 강조하는 하나의 용어로 묶어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1991년(국내 1993년) 개봉 후 오랫동안 대표적 페미니즘 영화로 꼽혀왔지만 오늘 이 작품을 통해 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류가 아니다. 영화는 두 백인 여성, 델마 디킨슨(지나 데이비스)과 루이스 소여(수잔 서랜든)를 앞세워 동시대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겪는 억압과 폭력을 고발하는데, 여기서 대결구도를 이끄는 성(性)이라는 한 꺼풀만 벗겨내면 저 이야기는 저마다의 억압을 겪으며 해방을 꿈꾸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자 판타지가 된다. 델마와 루이스는 어느 한 시대, 한 사회 여성들을 대변(대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성별과 세대, 출신지나 인종, 직업이나 취향 등 모든 차이를 떠나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장구한 생명력이다. 그럼 이제, 나와 당신이기도 한 델마와 루이스를 쫓아 그 해방의 여정을 떠나보자.     


여행이 끝없는 도주로


한껏 꾸미고 여행에 나선 델마(오른쪽)와 루이스가 셀카를 찍는 모습. 영화 <델마와 루이스> 스틸컷

델마와 루이스는 잠시 여행을 나섰을 뿐이었다. 그저 바람을 쐬려고. 친구 사이인 여자 둘이서 자신들이 묶여 있던 집과 직장을 떠나 교외 산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틀 일정으로 멋진 차를 몰고 떠난 여행은 기분 좋게 들른 술집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끝이 안 보이는 도주로 돌변하고 만다. 그리고 도망칠수록 두 사람은 엉망이 되고, 여행 전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멀어져 간다. 성폭력 피해자에서 살인자가 되면서 도망자가 되고, 절도를 당한 뒤 강도가 되고, 경찰관을 협박·감금하고, 경찰차들을 만신창이로 만든다.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상황에 놓이면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애쓰지만 뜻대로 풀리기는커녕 설산 꼭대기에서 굴린 눈덩이처럼 사태는 커져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델마는 얌전한 가정주부, 루이스는 평범한 식당 종업원이었다.


두 사람 성격은 거의 정반대다. 주도적인 루이스와 달리 델마는 수동적으로 살아왔다. 루이스는 화를 내며 탁자를 뒤엎는 남자친구에게 눈을 부릅뜨고 “이러면 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델마는 남편에게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조차 끝내 꺼내지 못한 채 “일 잘 하고 오세요”라거나 “저녁에 뭘 먹고 싶어요”라는 딴소리만 하고 마는 사람이었다. 델마는 결국 쪽지 한 장만 남기고 집을 나오는데, 루이스가 몰고 온 청록색 1966년형 포드 썬더버드에 올라탄 뒤로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사뭇 과감해진다. 바람에 펄럭이는 원피스를 입은 채로 다리를 조수석 대시보드 위에 올리고, 평소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백미러에 비친 자신을 보며 “나는 (델마가 아니라) 루이스야”라고 도도하게 말한다. 갈 길이 멀다는 루이스에게 술집에 들르자고 조르더니 술까지 권하고, 치근대며 접근해오는 남자를 웃으며 받아준다. 루이스는 오히려 조심스러워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대화하는 델마(왼쪽)와 루이스. 영화 <델마와 루이스> 스틸컷

남편에게 억눌려온 델마에게 여행은 작정한 일탈(탈출)로 보인다. 혼자 집을 떠나본 적 없는 그는 세상 물정을 잘 몰랐기에 더 분방해졌지만 이미 무서운 일을 겪은 적 있는 루이스는 더 경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터지자 델마는 루이스 뒤로 숨는다. 루이스에게 “(어떻게 할지) 생각 다 하면 깨워”라며 침대에 눕고, 루이스가 방법을 찾는 동안 비키니를 입고 음악을 들으며 일광욕을 한다. 루이스가 제시한 길에 대해서는 “난 몰라”라고 말할 뿐이다. 그게 델마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델마는 남편이 주인인 울타리 안에서 결정의 주체였던 적이 없고 감히 그러지도 못했으므로 그럴 필요도 없어졌을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내 일이 아니라는 듯 ‘보이지 않는 울타리’ 뒤로 물러서는 델마에게 루이스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순진한 척, 제정신이 아닌 척 넘어가려고 하는데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고 나무란다.


도주에서 전진으로


두 사람은 국경을 넘기로 한다. 저 너머에서는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어차피 이곳에는 버리지 못할 만큼 미련을 가질 만한 게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정당방위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해 도망쳤고, 도망치는 동안에는 잡히지 않기 위해 더 이상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기 어려울 범행을 저지르면서 돌이킬 수 없어진다. 델마와 루이스의 돈을 훔쳐 달아나고도 뻔뻔하게 발뺌하는 건달 제이디(브래드 피트)에게 형사 슬로컴브(하비 케이틀)가 다그친다. “네가 돈을 훔치지 않았어도 델마가 강도짓을 했을까? 그 여자들한텐 아직 기회가 있었어. 네가 그걸 망친 거야.”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원인을 따지는 것은 윤리적으로 중요하다. 델마와 루이스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을까 하는 질문.


루이스(왼쪽)가 총을 쏘아 보이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델마. 영화 <델마와 루이스> 스틸컷

고속도로에서 속도위반 단속을 위해 자신들을 잡아 세운 경찰관에게 총을 겨눈 델마는 말한다. “3일 전만 해도 이런 짓은 꿈도 못 꿨어요. 우리 남편을 보면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가 될 거예요.” 델마는 권위적이고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남편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려고 루이스를 따라 여행에 나선 것이었다. 위기에 처한 뒤에는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를 걸었지만 남편은 집에 없었고, 뒤늦게 연결된 첫 통화에서는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허락 없이 여행을 떠난 사실만으로 윽박을 질렀다. 이런 남편이 아니었다면 델마는 도망치지 않았을지 모른다. 델마는 자기 힘으로 살아남으려다 무법자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갑자기 곤경에 빠뜨리는 문제적 상황들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도망치려고, 해결하려고. 두 가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델마와 루이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삶은 많은 부분이 ‘아차’ 싶도록 저질러지며 전개되는 이야기다. 도망자 신세가 된 두 사람이 번갈아 차를 몰며 끝없이 이어지는 황야의 도로를 밤낮없이 달리는 장면은 막막하게 느껴지면서도 절망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달리는 포드 썬더버드 안에서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델마가 루이스에게 말한다. “깨어 있는 느낌이야. 한 번도 이렇게 깨어 있던 적이 없는 거 같아. 모든 게 달라 보여. 새로운 게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거 같지?” 경찰에 포위된 뒤에도 “잡히지 말고 계속 가자”고 말한다.


경찰차에 추격당하는 델마(왼쪽)와 루이스. 영화 <델마와 루이스> 스틸컷

이들에게는 국경 너머라는 목적지가 있고, 거기에 가면 새로운 삶이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 삶은 앞서의 삶보다 더 ‘나다운’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해변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이름도 바꾸고, 큰 목장에서 살고, 휴양지 일자리도 구할 거”라는 꿈을 꾼다. 그러니 이제 델마와 루이스는 무언가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그 여정은 ‘절망적 도주’가 아니라 ‘희망적 전진’이라고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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