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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너머 Oct 22. 2023

오늘도 바람이 분다

프롤로그

  30여년을 다니던 직장을 떠나 모두 일터로 출근하는 시간에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2022년 3월 2일 아침을 기억한다.  아이가 긴 방학을 끝내고 4학년 첫 등교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엄마, 나 오늘이 너무 기대돼".  두근대는 아이의 마음이 내게로 전해졌다. "엄마도 너무 기대된다. 오늘 이후의 삶이~"  라디오에서 루이암스트롱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 What a wonderful world~ ', 목쉰 늙은 가수의 노래가 가슴을 뚫고 들어왔던 자유의 첫 날이었다.  


 카페에 앉아 싱가폴항공 홈페이지에 들어가 항공권을 바꿨다. 마침 4월 1일부터 말레이시아에 해외입국자 격리가 4월 1일자로 없어진다는 발표가 있었다. 4월 2일 토요일 오후 4시 30분 출발, 한 달 후엔 무조건 간다. 그러나 출발 일주일을 앞두고 겸이가 코로나에 걸리고 나까지 양성 판정이 나와서 또 항공권을 바꿨다. 한 달 후에나 도착한다는 선편으로 책과 생활 용품 몇 가지를 20키로 짜리 박스 세 개에 넣어 미리 페낭으로 보내놓고 , 25키로를 채운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이 4월 11일 새벽이었다. 


  싱가폴을 경유하여 불빛 환한 페낭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리니 다른 세상이었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손자를 붙들고 “네 엄마가 낼 모레면 환갑이여~” 허걱, 내 나이를 나보다 더 잘 세고 계시던 구십이 넘은 시어머니의 눈물바람도, 오래 전부터 퇴직하면 해외에 나가 일 년만 살다오겠다고 했을 때 농담처럼 그러라고 해놓고 막상 실행 계획을 내놓자 적잖이 당황하던 남편도. 그리고 가까이 사는 큰딸을 마음으로 가장 의지하며 살고 계신 건강이 좋지 못한 친청부모님도 다 잊기로 한다.   ‘너는 충분히 자격이 있어.'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아이의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보내고 나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고 나가 바닷가를 달리던 날들,  물건이 많지 않은 집의 마루마닥을 쓸고 닦고, 세탁기에 빨래를 넣어 돌리고 그리고 베란다에 탈수를 마친 빨래들을 탁탁 털어 널고 잠시 파란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 바람과 햇볕에 몸을 맡기고 말라가는 빨래들을 바라보던 평화로운 날들.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책을 읽다가 잠시 빈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자기도 하고,  좋아하는 야채와 견과류로 만든 샐러드로 끼니를 해결하고 차를 마시고 오후가 되면 바삭하게 마른 빨래들을 걷어 차곡차곡 개는 시간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돌아올 아이를 위해 간식을 준비하고 휴대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이와 실갱이를 하며 아이의 공부를 체크하는 시간도 , 함께 저녁 노을을 보며 밥을 먹고 바다를 보며 설겆이를 하던 시간도. 특별할 것 없는 그 일상이 감미로웠다. 페낭에 와서 다시 한 번 빠져들었던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처럼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그 모든 날들이 좋았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발코니로 통하는 문을 열면 멀리 보이는 바다, 말라카 해협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널어놓은 빨래를 흔들고, 하얀 망사 커튼을 흔들고 내 마음을 부풀린다. 내가 비로소 자유라는 걸 늘 일깨워주던 그 바람이다. 아무것도 안 할 수도, 무엇이든 할 수도 있는 시간이 내 앞에 주어졌다는 사실에 설레고 두려웠던 날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돌아갈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이 글은 오직 나와 내가 사랑하는 아이만을 위해 살았던 충만하고 아름다와서 꿈 같았던 이기적인 날들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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