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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너머 Oct 22. 2023

안부를 묻는 당신께

첫 편지 

지난 4월 11일 밤 늦게 페낭 공항에 내렸습니다. 벌써 이주가 지났군요.

미리 예약해 놓았던 호텔에 삼일 간 머물면서 이 곳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집을 구하고 4월 14일 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당장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과 식재료를 사러 다니고 밀린 빨래를 하고 커다란 캐리어 두 개에 가득 채워온 물건들 정리를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집 정리가 대강 되었고 정수기와 인터넷이 들어와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 겸이가 등교를 하게 되면 좀 더 여유가 생기겠지요.


 퇴직을 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한 휴양지에서의 삶은 아직까지는 당신과 제가 상상하던 것만큼 낭만적이거나 여유롭지만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며칠 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덥고 눅눅한 공기 때문에 계속 틀어 놓아야만 하는 천정에 매달린 커다란 씰링팬의 소음과 밤새 살갗에 닿는 바람도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은 높은 침대와 삼십 층 아래 큰 길을 지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소음들. 한 밤중에 몇 번씩 깨면 답답한 공기 때문에 에어컨을 켰다 끄고 다시 잠드는 일을 반복하는 날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자다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몸도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새벽이 오면 동네 모스크에서 노래하는 듯한 남자의 기도소리가 알람처럼 울려 퍼집니다. 십 초쯤 후엔 옆 동네에서 틀어 놓은 비슷한 톤의 기도 소리가 우리 동네의 기도 소리와 겹쳐 이중창으로 울리다 일 이분 쯤 후에 사라집니다. 성능 좋은 확성기를 통해 새벽마다 동네에 울려 퍼지는 남자들의 기도소리는 제가 낯선 땅에 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 또한 좀 지나면 일상처럼 무뎌지겠지요.


아침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거실에 나오면 맨 먼저 베란다 문을 활짝 열며 새벽의 쌀쌀한 공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는 한(비오는 날은 시원합니다) 실내와 별로 다르지 않은 미지근한 공기가 훅 다가옵니다. 의자에 앉아 점점 깨어나는 이방의 도시를 내려다봅니다. 이름모를 페낭의 새가 큰 소리를 내며 날아다닙니다. 아직도 불빛이 남아있는 어둑한 도시에 부지런한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굉음들이 들려옵니다. 사실 이 소음들은 베란다 문을 닫지 않는 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들려옵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삶에서 잠시 쉼을 위해 선택한 공간이 이처럼 온종일 소음 가득한 도시의 아파트 삼십 층이라는 사실이 문득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주거지를 원했지만 여러 상황이 지금의 선택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모든 일이 그렇듯 삼십 층이라는 공간에서의 삶도 모든 것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아직도 베란다에 나가면 다리가 후들거려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고,  잠을 자려고 누워도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불안하지만 매일 아침 붉은 이국의 지붕들 너머 수시로 변하는 바다의 빛깔을 보며 차를 마시고 , 저녁이 오면 하나씩 불빛이 켜지는 마을과 바다위에 펼쳐지는  황홀한 노을을 바라보며 식탁을 차려 아이와 함께 밥을 먹는 생활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지곤 합니다.


오늘은 발코니에 나가 차를 마시며 제가 두고 떠나온 집을 생각했습니다. 지나가는 바람이 흔드는 풍경소리와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가 전부였던 절간처럼 조용한 산 밑의 작은 집과 쌉쌀한 새벽 공기가 떠올라 잠시 목이 메었습니다. 마루에 서서 눈물짓는 어머니를 보지 않으려 서둘러 차에 오르던 그 날, 집을 빠져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배꽃이 일제히 몽우리를 터뜨리던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저는 왜 익숙하고 눈물나는 것들을 두고 머나먼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 와야만 했던 것일까를 자주 생각합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이곳에서의 날들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되어야겠지요. 늘 고마운 당신이 있어 이제 첫 줄을 시작합니다.  오늘도 당신과 나의 삶이 아름답기를. (2022. 4.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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