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서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쉽지 않다. 숲 속의 식물들은 그들 스스로 새싹을 틔우고 자라고 때론 쓰러지며 순환을 이어간다. 인간과 식물이 근접한 거리에서 살아가려면 서로에 대한 적당한 양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봄철만 되면 지나친 가지치기가 여기저기에서 눈에 띈다. 이를 항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나무의 말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나친 가지치기를 당한 나무에서 새순이 나고 꽃이 필까 걱정하지만 나무는 생태시계에 맞추어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해 낸다. 그런 나무들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화도 공공재인 가로수나 공원수의 경우에나 해당한다. 개인 소유의 나무일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사계절 아름답게 감상하던 이웃집 아름드리나무를 주인이 지나치게 잘랐다거나 베어 버린다고 해도 항의할 수 없다. 여름 내내 주황빛깔 꽃을 보여주는 능소화 덩굴 아랫단을 자를 때도 마찬가지다. 만약 타인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문제시되지만 주인이 그렇게 했다면 뭐라 말할 수 없다.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그 마음속 항의마저 하지 못 할 수도 있다. 뒤뜰의 은행나무와 담장 밖의 가래나무에 가려 항상 축축하게 젖어있는 뒤뜰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나무를 자른 소유주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 시간을 음지에서 보내야 했던 부모님은 새 터에 집을 지으면서 창문도 두 개씩 만드셨다.
도심에서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도심에서 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이 더 대단해 보인다.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데는 ‘적당히’라는 모호한 말이 필요할 것 같다. 적당히 베어내길, 적당히 거리를 두길, 적당히 마음을 주길.. 심한 가지치기를 당했는데도 꽃을 피우는 모두 나무들을 응원한다. 힘을 내서 꽃을 피우길.. 그리고 살아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