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열사, 지사, 투사
초등학교 시절 안중근 의사에 대해 처음 배웠을 때, 나는 그가 실제 의사인 줄 알았다.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그런 의사 말이다. 선생님이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라고 연달아 말씀하시자 더욱 확신했다. 아,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의사였구나.
얼마나 순진했던가.
그 '의사'가 'doctor'가 아니라 '義士', 곧 의로운 선비라는 뜻임을 알게 된 건 수업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호칭 하나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독립운동가를 부르는 호칭에는 법칙이 있다.
의사, 열사, 지사, 투사. 비슷해 보이지만 각각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마치 영어에서 Mr., Dr., Prof.로 사람을 구분해 부르듯, 독립운동가들도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에 따라 다른 존칭으로 불린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를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두 가지로만 공식 구분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그보다 섬세하다. 그분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싶어 한다.
'의사義士'는 무력으로 항거한 분들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고,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졌고, 이봉창이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모두 총과 폭탄으로 직접 적과 맞선 분들이다.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목숨을 걸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 자체가 의로운 선비, 곧 의사가 되는 조건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을 때와 이봉창이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을 때, 그 순간의 용기에는 우열이 없다. 모두 자신의 목숨을 던져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열사烈士'는 비폭력으로 항의하다 순국한 분들이다.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고문으로 순국했고, 이준이 헤이그 특사로 가서 일제의 불법성을 알리다 분사했다. 총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저항 의지를 보인 분들이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만으로는 완전한 연주가 될 수 없다. 첼로도, 플루트도, 팀파니도 각자의 역할이 있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하모니가 만들어진다. 독립운동도 마찬가지다. 열사들의 가치는 무력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게 아니다. 모두 뜨거운烈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한 분들이다.
'지사志士'는 뜻을 품고 평생을 바친 분들이다.
신채호가 글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웠고, 박열이 아나키즘 운동을 통해 저항했다. 순국하지 않았어도, 무력을 쓰지 않았어도, 독립에 대한 뜻志을 품고 활동한 모든 분들이 지사다.
마치 지하철 노선도에서 모두 다른 경로로 달리지만 결국 한 도시를 연결하듯, 지사들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조국 광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중요한 건 어느 노선을 탔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려 했느냐다.
'투사鬪士'는 의사, 열사, 지사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모든 분들을 부를 때 쓴다. 투쟁鬪爭하는 선비라는 뜻이다. 어떤 방식으로 싸웠든 주적 일본과 맞서 싸운 분들이라면 모두 투사라 부를 수 있다.
왜 이렇게 세세하게 구분할까.
국가보훈처의 공식 분류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안중근을 그냥 '독립유공자'라고 부르는 것보다 '안중근 의사'라고 할 때 그의 의로운 행동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유관순을 '애국지사'라고 하는 것보다 '유관순 열사'라고 할 때 그의 뜨거운 희생이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호랑이 같은 기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분들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는 일이다.
호칭에는 힘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호칭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의미를 알고 부르는 것과 모르고 부르는 것은 다르다.
MBTI에 유독 열광하는 한국 사람들처럼, 우리는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호칭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다. 존경의 표현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어떻게 부르느냐에는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다. '선생님'과 '쌤'의 차이, '사장님'과 '대표님'의 뉘앙스, '엄마'와 '어머니'의 거리감.
독립운동가들의 호칭도 그런 것이다. 단순히 이름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희생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담아 부르는 것이다.
의사, 열사, 지사, 투사.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존경이 그분들을 영원히 살아 숨쉬게 한다.
호칭 하나에도 역사가 흐른다. 우리가 부르는 이름 속에,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