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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Oct 01. 2020

얼이 빠진다는 것

육체에게 고하는 영혼의 작별인사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생기를 잃는다. 얼빠진, 넋 빠진 상태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그런 아이들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떤 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그저 옛날 사람 같아지는 것이다. - 자기 앞의 생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얼"이란 정신 혹은 영혼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하여 얼이 빠졌다는 것은 육체에서 정신이 이탈된 것, 즉 나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요인으로 인하여 육체에서 정신이 끄집어내진 것처럼 보이는 형상을 의미한다. 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는 얼빠진 놈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얼이 빠지는가.  


첫눈에 반했던 기억이나 로또에 당첨되는 것, 혹은 아름다운 자연이나 예술품에 마음을 뺏기는 것처럼 황홀함이나 무아지경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여 얼이 빠졌던 경험을 얼빠진 상황과 연결시킬 수 있다면 얼이 빠졌다는 말이 그리 나쁜 의미로 다가오진 않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엔 다른 것이 떠오른다.


8살인가 9살 즈음 친구의 교통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했던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살던 집 바로 앞은 왕복 8차선 정도 되는 도로가 있었다. 친구와 하교 후 집으로 걸어오던 길에 친구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혹은 용감함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갑자기 도로를 가로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차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꽤 긴 구간이 직선으로 뚫려있는 곳이라 "보이는 것보다 차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라는 말이 들어맞는 순간을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렇게 도로의 양 끝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던 친구를 바라보며 그만하고 이리 오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 같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말을 태어나서 처음 경험했던 순간이었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해맑게 웃으며 뛰어오던 친구가 꽤나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에 치여 나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날아가던 그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람마다 다른 상황 속에서 얼이 빠지는 경험을 할 테지만 긍정의 얼빠짐이 아닌, 피치 못하게, 원치 않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할 때의 얼빠짐은 꽤나 위험하다.


이것이 왜 위험하냐면 정신이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아무것도 막아낼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일상을 가두고 아무것도 초월한 적 없으면서 세상만사에 초월한 듯한 태도를 갖게 된다. 이렇게 얼이 빠지는 경험은 인생의 어느 나이에 겪더라도 좋지 않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 좋지 않다.   


우리는 과연 불의의 사고를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불가피한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세상에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살다 보면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예상치 못한 좌절을 겪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문득 내 의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 내가 컨트롤해 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나의 노력으로 세상의 어느 한 부분에 흠집조차 낼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물에 젖은 코트처럼 무겁게 내 감싼다.


그래서 사람은 오만해지는가 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끊임없이 잘 풀리는 사람은 오만해지는가 보다.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족쇄를 부르는 생각과는 달리, 무엇이든 내 뜻대로 된다는 나르시시즘적인 생각은 자칫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앗아가 세상 일의 인과관계에서 자신의 결정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MC 중 한 사람인 강호동은 어느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오만했었노라 고백한다. 중학생 때부터 씨름을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세계에서 최고가 되었고 연예계라는 새로운 새계에 도전하여 또다시 최고가 되었다며 젊은 날의 이른 성공이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져왔으며, 확신은 이내 오만함으로 바뀌어 슬럼프가 오기 전까지 그 오만함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이것이 비단 강호동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초년 성공은 불행한 일이라는 말이 있다. 내공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의 성공은 위험하다는 말일 테다. 잘 나갈 때 겸손한 사람이 진짜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맥을 같이한다.


오만함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얼빠짐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겠다. 어떤 이유가 되었건 우리는 삶에 있어 반드시 얼빠짐을 경험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을 슬기롭게 이겨낼 것. 우리가 약속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할,  하나의 다짐을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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