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호 Jul 11. 2020

손에 땀을 쥐고 산다는 것

다한증

어떤 것을 겪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겪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만 때로는 어떤 것을 겪어왔는지, 혹은 지금 겪고 있는지, 경험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일생일대의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 다한증이 그렇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유독 손과 발 주변이 축축하다. 이불 빨래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뽀송뽀송한 느낌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는데 금세 눅눅해져 버렸다.


출근 전에 음식물 쓰레기를 좀 버리려고 비닐장갑을 껴본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1초면 스르륵 끼워질 비닐장갑이 내 손에 들어가려면 수십 초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나마 완벽하게 잘 들어맞게 끼워지기도 힘들다.


쓰레기 하나 버리고 왔는데 목이 타서 생수를 한통 마시려고 냉장고에서 물을 한 통 꺼냈다. 돌려서 까야하는 뚜껑인데 땀 때문에 마찰력이 없어 손 안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한다. 두리번거리며 수건을 찾아 겨우 뚜껑을 따냈다.


오늘 출근복을 고르기 위해 드레스 룸을 둘러본다. 유독 손목 부분에 손때가 자주, 빨리, 많이 묻어나는 것 같아 흰 셔츠는 이제 그만 사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긴팔을 입어야 하는 겨울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겨울이 지나면 또 다른 형태로 불편할 것이 뻔하지만 손 때 묻은 셔츠를 관리해주는 부인을 생각하면 덥더라도 손목 부분은 세척할 일이 없는 형태의 옷차림이 가능한 여름이 차라리 좋겠다고 생각한다.


출근하며 며칠 전 친구에게 빌린 책을 챙긴다. 다 읽었으니 오늘 가져다줘야겠다. 책이 젖어 쪼글쪼글해지지 않게 읽으려고 책 가장자리를 조심조심 잡아 넘기며 읽느라 책을 읽는 것인지 종이를 세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남의 책을 빌려 읽거나 서점에서 책을 구경할 때면 으레 겪는 기분이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타려는 순간 예전에 알고 지내던 지인과 오랜만에 마주쳤다. 이곳에 살고 있던 모양이다. 반갑게 악수를 건네는 지인의 손을 반갑게 마주하고 싶지만 흐르는 땀을 바지 뒤편에 닦는 일이 먼저다. 대충 닦아낸 후 민망함을 숨기고 악수를  해보지만 역시나 흠칫 놀라는 표정을 애써 감추는 상대방을 발견하고 그것을 모르는 척 넘기는 일은 여전히 민망하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출근 전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정신이 없었던 모양인지 손과 발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땀이 흐르는 것 같다.


직장에 도착하여 슬리퍼로 갈아 신으며 양말을 벗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땀 때문에 걸을 때마다 찔꺽찔꺽 소리가 날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여름에 샌들을 신어본 적이 없다.


오늘은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이다. 나는 배구부를 맡아서 지도하고 있다. 마찰력이 많이 필요한 농구보다는 덜하지만 배구 역시도 토스를 할 때는 가끔 미끄러져 공이 내 손을 빠져나가곤 한다.


니스, 배드민턴, 탁구 등 라켓을 쥐고 하는 운동은 더 어렵다. 라켓이 자꾸 돌아가거나 미끄러져 손에서 가끔 떨어뜨리기도 한다.


가장 힘든 운동은 맨손 맨발로 하는 운동이다. 유도, 태권도, 맨손체조, 철봉 운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마찰력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끄러지지 않고 버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은 학생들 수업이 끝난 뒤 교직원들의 연수가 있는 날이다. 오늘 연수 주제는 우쿨렐레 연주다. 악기 역시 쉽지가 않다. 운지법을 배울 때마다 나의 손가락을 교정시켜주는 강사님의 당황하는 눈빛은 나를 당황시킨다. 줄이 빨리 녹슬진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맞물려 연습에 몰입하긴 오늘도 글러먹은 것 같다.


연수가 끝난 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프로그램을 다룰 줄 몰라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화상으로는 설명이 어려워 직접 우리 반으로 와서 함께 모니터를 보면서 배우기로 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만지는 순간 동료 교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나의 동공도 함께 흔들려버리고 말았다.


이제 슬슬 정리하고 퇴근할 준비를 해야겠다. 자동차에 앉아 시동을 켜고 음악을 듣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다. 물이 묻어 있었는지 터치가 잘 먹지 않는다. 알고 있다 이건 물이 아니라 내 땀이다.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닫은 뒤 옷에 한 두 번 슥삭 닦아내어 수분을 제거한다. 그제야 터치가 잘 먹혀 들어간다.


손수건으로 중간중간 땀을 닦아내며 자동차 핸들을 꼭 붙잡는다. 중간중간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에 내 손을 한 번 맡겨본다. 뒷 차는 저 무슨 도라이인가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중요하고도 상쾌한 증발의 의식 같은 행위이다.


집에 와서 제 갓 돌이 지난 아이를 안아본다. 아이의 몸에서 열이 나는 건지 내 손의 열이 아이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안아주면 유독 아이가 더 더워하는 것도 같다.


우리 아기는 다한증이 없어야 할 텐데 고칠 수 없는 불편한 병을 물려주게 되면 어떡해야하나 오늘도 아이와 마주하며 혼자서 걱정을 한다.  


 약간의 픽션이 가미되어 있긴 하지만 거의 팩트에 가까운 다한증을 가진 한 사람의 하루일과임에 틀림없다.

대략 생각나는 것들만 가지고 하루를 꾸며봤지만 사실 이것보다 훨씬 불편한 일들도 많다. 다한증은 고통스러운 질병은 아니지만 일상 생활을 너무나 불편하게 만드는 질병이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다한증과 함께 생활해오면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다양한 불편함을 겪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힘듦을 자각하기 시작했던 순간은 아마도 타인과의 관계를 심도 깊게 고민하게 되는 중학생 시절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내 기억속에 다한증으로 인해 처음 불편함을 겪었던 순간은 중학교 무용시간이었다. 서양 전통 무용을 배우는 과정에서 남녀가 원형으로 서로 짝을 바꿔가며 추는 춤을 배우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때 여학생들의 반응이 내가 기억하는 다한증으로 인해 처음 겪은 마음이 불편했던 순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운이 좋아 친구들에게 땀을 뿌리거나 발라도, 웃으며 넘겨주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기에 오히려 그것으로 장난을 치며 다한증이라는 약점을 잘 극복하며 청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한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보통 대인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다한증은 현재 완벽한 치료법이 없다. 바르는 약물, 보톡스 주사법, 이온 영동 치료법, 수술 등 부작용이 있거나 부분적으로만 효과를 볼 수 있는 치료법만 몇 가지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땀 때문에 터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자판 오류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이제는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신체적인 불편함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심리적인 불편함은 다양하게 피해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자녀를 키우다 보니 다시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부모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다한증에 관하여 내가 바라는 것은 2가지다. 하나는 어서 빨리 치료법이 나와 다한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는 날이 오기를. 또 다른 하나는 나의 자녀가 다한증을 물려받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


 혹시라도 다한증을 가지고 있다면 잘 이겨내시길 바라고 다한증이 없다면 이 다한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얼이 빠진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