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안 : 눈을 뜨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에는 한 신경학자가 그간 자신이 만나온 다양한 환자들의 사례가 실려있다. 그 사례들 가운데 '매를린의 손'이라는 제목의 사례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주인공은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인해 앞을 보지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정위 운동증이라는 질병까지 앓고 있었는데 이는 두 손을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는 질병이었다. 태어나면서 아기들은 눈과 손의 협응력을 발달시켜가며 세상을 탐구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시각과 두 손의 자유로움을 태어날 때부터 박탈당한 주인공은 가족들의 돌봄을 받으며 평생 동안 집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결과 안타깝게도 스스로 손을 움직이는 능력을 획득하지 못한 채 60세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다행스러운 것은 청각에는 이상이 없어 녹음된 테잎이나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글을 통해 세상을 상상하며 수많은 이미지를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추후 이 책의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 손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통증이나 온도를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고 다른 물체와 접촉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손을 기능적으로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인체의 신비가 연속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인지 이런 사례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싶어 지면서 일단 수긍을 하게 된다.
평생 한 번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손을 써본 경험이 없는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로 손을 사용하도록 만들기 위해 책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특정한 상황을 반복해서 연출한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이 배고픈 상황에서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도넛을 올려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루하게 반복되던 나날 가운데 어느 날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던 주인공이 스스로 팔을 뻗어 도넛을 움켜쥐고 입으로 가져가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 후 그녀는 놀라운 속도로 손을 사용하기 시작해서 손의 기능을 회복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맹인 조각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그다지 감흥이 없는 장면으로 다가오겠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주인공이 손을 움직이는 장면은 예전의 기억을 떠오르게 해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십 대 초반 교통사고를 경험했었다.
오른쪽 팔뚝의 바깥쪽 살점이 움푹 파일 정도의 상처를 입어 오른손 팔꿈치 아래의 신경이 끊어졌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다. 신경이 죽었다는 의사의 진단대로 사고 이후 오른쪽 팔꿈치 아래를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팔이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 매를린과 달리, 나는 나의 팔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인식하지 못한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 어려운 일인지, 인식할 수 있지만 죽어버린 것을 되살려내는 것이 어려운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매를린과 같았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치료의 나날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꿈틀 하며 움직이는 팔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최초의 시도나 경험, 혹은 최초의 어떤 자극은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매를린이 최초로 손을 움직이던 그 순간, 나의 신경이 되살아나 최초로 꿈틀대던 그 순간은 아마도 한 개인에게 있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나 닐 암스트롱이 최초로 달에 착륙하던 순간과 비견할 정도로 놀라운 발견과 진입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과
한 번이라도 해본 것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경험이 없다는 것은 그 세계를 가늠해볼 기준이 없다는 것이고 기준이 없는 세계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 따라서 최초의 어떤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그 경계를 단 한 발자국도 넘어설 수 없으며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을 꿈꾸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인지하게 되고 이것은 때때로 특별한 계기가 되어 한 인간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런 극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경험은 인간에게 어떤 종류가 되었건 자극을 전해주고 이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구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의 "해봤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해봤냐는 말속에는 나는 해봤고 결국 성공해냈다는 성취에 근거한 자신감이 스며들어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단지 성취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데에서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봤느냐는 말에는 너는 그 경계를 넘어 보았는가, 그 너머에 비전을 보았는가, 그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포함되어있다.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말이 다소 강압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사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최고의 증거는 단연코 경험이다
영국의 경험주의자 프랜시스 베이컨 역시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물론 경험을 넘어서는 통찰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사유가 지닌 힘이겠지만 오직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식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다시 한번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