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죽은 자의 집 청소

처참한 외로움과 마주하는 일

by 정 호
특수 청소라는
다소 생소한 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청소라고 하면 으레 먼지로 대표되는 분진가루 등을 제거한다거나 쓰레기를 종류에 맞게 분류해내는 분리수거, 혹은 먹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 정도밖에 떠올릴 수 없었던 나의 부족한 상상력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책을 덮자마자 한 여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갑작스레 쏟아져 내려 피할 새도 없이 나를 덮쳤다.


죽음이나 존재의 소멸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나름 골똘히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그 생각들을 가끔 들여다보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해왔건만, 진짜 죽음과 매일 마주하며 살아온 사람의 기록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간 해왔던 사색의 시간이 어찌나 가볍게 느껴지던지 부끄러워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작가는 냄새를 통해 죽음을 발견한다. 카페에 앉아있다가도 냄새를 통해 환풍구의 어디 즈음에 고양이가 죽어있을 것이라 예상하게 만드는 그의 후각은, 갓 태어난 아이를 위협으로부터 지켜내려는 어미의 감각처럼 예민하게 곤두서 있다. 냄새를 통해 죽음을 지각하는 것. 영화 기생충에서는 냄새를 통해 생활환경의 차이, 어떤 경계를 표현했다. 작가에게 냄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명확하게 가르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표식과도 같다.


작가는 아주 예민한 후각을 소유한 사람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특정한 냄새를 포착해내는데 특화된 후각을 소유한 사람이다. 죽음을 맡을 수 있는 예민한 후각은 오랜 시간 자신과 함께 해온 특수 청소라는 업이 선물해준 특별한 능력이다.


선물... 이것은 본업을 제외한 일상에서도 과연 선물일 수 있을까. 직업을 통해 탁월한 능력을 습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두고 특화되었다거나 전문가의 수준에 올랐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말로는 "직업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해당 업의 일을 진행할 때에는 이렇게 특화된 재능이 효율적인 일처리를 돕는 훌륭한 도구로써 작동할 테지만 일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쓸모는커녕 오히려 번거롭기만 하여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에는 안타까운 공통점이 포착된다. 그것은 바로 "단절"이다. 가족과의 단절, 사랑하는 사람과의 단절, 경제적인 단절, 사회와의 단절이 바로 그것이다. 전기가 끊기고 수도가 끊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래도록 이어온 따스했던 관계가 끊긴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차라리 덜 아팠을까? 연결의 세상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단절이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심을 하도록 만들 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세상과 끊어지고 만다.


아이언맨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로버트 다우 주니어는 철이 들기도 전인 7세의 나이에 아버지에 의해 마약을 접하게 된다. 너무 어린 나이에 마약에 중독되어버려 이후 오랜 시간을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어렵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런 그가 어떤 계기로 마약을 끊게 되고 이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


마약을 끊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마약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생을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그 순간의 비통함과 허무함을 생각하면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쓸쓸함과 절망감에 절로 숙연해지게 된다.


삶을 이어갈만한 아주 작은 끈이라도 있었다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일만큼은 저지르지 않았을까? 아홉 가지 복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가지 복을 잃어버린 사람은 고통스럽다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아홉 개의 불행 속에서 한 가지 행복을 쥐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 안 되는 것일까? 누가 더 행복한 것이고 누가 더 불행한 것일까?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다양한 루트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적은 것은 가진 사람은 적은 루트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사람마다 세상과 연결고리, 일체감을 느끼는 지점은 다르겠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아마도 비슷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단절. 극도로 궁핍하여 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가난.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70%가 물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는 맞을지라도 사회학적으로는 완벽히 틀린 말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어쩌면 재화와 정서에 절반씩 저당 잡혀있는 상태로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김창옥 교수는 젊은 시절 너무도 괴로워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한통 걸고 싶었다고 한다. 그때 김창옥 교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죽지 마"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고 한다. 아마도 그 전화는 세상과,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스스로 던져보는 마지막 동아줄 인지도 모른다


책에는 자연사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거둔 사람들의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세상과 이별한 지 꽤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은 대부분 가난과 고독의 결과물이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 고독하지 않은 사람들은 생이 다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되지만 가난과 고독은 빠른 발견과 빠른 처치로부터 조금 멀찍이 망자를 떨어뜨려둔다. 생전에도 신속한 피드백과 거리가 있었을 그들이 사후에도 그 처지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몹시 서럽다. 슬프고도 처절한 결단을 내리기까지 그들은 어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었을까.


무거운 책이었지만 삶의 새로운 한 면을 알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너무 힘을 준 문체 탓에 현실의 냉혹함이 흐려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도적이었을까?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발휘해 잔혹한 현실의 이미지를 조금은 부드럽게 희석하고 싶었던 것일까. 또는 사자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업에 대한 숭고함과 겸허한 어떤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묵념의 의미로 다양한 수사를 활용했던 것일까. 사회문제를 다룬 책 치고는 너무도 유려한 문장에 때때로 문학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 현실감이 반감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완벽한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의 말처럼 죽음과 삶은 연결되어 있다. 삶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고 죽음의 시작은 삶이었다. 생의 시작이 우리의 뜻을 배제한 자연의 순리였던 것처럼, 생의 끝 역시도 자연의 순리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부둥켜안고 그래도 살아보자고 외쳐줘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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