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끊임없이 자신과 사투를 벌이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by 정 호

서정적인 제목을 보고 소설 비슷한 장르일 것이라 짐작하게 만드는 제목의 이 책은, 40여 년 전에 기록된 한 신경학자의 방대한 질적 연구자료 사례 모음집으로 문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차라리 임상보고서에 가까운 기록 일지에 가깝다.


과학과 기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의사로서 차갑고 냉철한 시선으로 객관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환자를 판단하며 의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것 같지만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단순히 임상기록을 사실적으로 남기기보다는 그 기록을 바탕으로 인간을 보다 깊이 바라보고, 그들을 단순히 진료해야 하는 환자가 아닌 자신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가까운 지인들과 다를 것 없이 대하며 그들의 인생을 들여다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은 크게 상실, 과잉, 이행, 단순함 4개의 챕터로 나뉘어있고 총 24명의 사례를 실었다. 신경학자로써 맞이한 환자들에 관한 기록이다 보니 책에 기록된 환자들은 신경 계통에 이상이 생겨 여러 형태로 그 증상이 발현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뇌신경에 문제가 생겨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토록 다양한 형태의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슬프면서 두려웠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두 사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부. 상실 - 길 잃은 뱃사람


치매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치매라고 부르는 질병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듯한데 해당 사례의 정식 병명은 "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뇌의 유두체의 신경세포가 알코올로 파괴될 때 발생하게 된다. 책에서는 이런 환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환자들은 자기가 받은 인상 전체를 종합해서 시간적 순서에 따라 하나로 연결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하나 분리되고 고립되어 아무런 맥락이 없는 잡다한 인생의 굴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치매환자가 보이는 퇴행이나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유머러스하고 지능검사 결과 지능도 뛰어났으며 금세 해결할 수 있는 어려운 문제들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다만 시간이 걸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려웠다. 도중에 자신이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증상은 바로 전에 일어난 일을 즉시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었다. 지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진지하고 심오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그런 대화를 나누다가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무슨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마는 식이었다. 작가는 이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인생이 망각의 세계에서 녹아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아팠다. 그는 순간 속의 존재이다. 망각과 공백의 우물에 갇혀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과거가 없다. 과거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그는 그저 순간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는 대부분의 기억을 잃어버렸거나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 섞인 채 기억의 파편을 붙잡아두고 있었지만 1945년까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치매에 걸리게 되면 가까운 기억부터 차츰 사라져 간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1945년의 기억도 점차 희미해지며 기억의 경계는 점점 더 이전의 시간으로 뒷걸음질 치게 될까? 왜 코르사코프 증후군이 발현되기 시작한 순간 여러 기억의 경계 가운데 1945년이 기준점이 되었을까? 2차 세계대전이라는 강렬하고 충실했던 생의 경험은 치매라는 저주의 순간에서도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만한 기억이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너무나 강렬한 경험은
때때로 인생의 시계를
그 시점에 붙박아 버리는지도 모른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끔찍했던 기억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생을 통틀어 가장 충실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매 순간이 생과 연결되어 있으니 행동 하나하나가 어찌 충실치 않을 수 있으랴.


이런 극적인 경험은 전쟁 이후의 평화를 평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탄산이 빠진 맥주처럼 밍밍한 일상으로 인식하며 살아가게 만들지도 모른다. 우리도 때때로 과거의 영광이나 과거의 불행이 너무도 강렬해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오래도록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타인, 혹은 스스로를 마주할 때가 있지 않은가. 강렬한 경험은 삶을 생생하게 느끼게 만들기에 그만큼 매혹적이지만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이 있어 헤어 나오기가 무척이나 힘이 든다.


소멸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에서 소멸을 바라보아야 하는 일은 어쩌면 지옥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소멸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감히 다행스럽다고 말해도 될까? 가족 중 치매환자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환자의 정신이 멀쩡하게 돌아와서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허망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마 잘 알 것이다.


치매에 걸려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과거를 잃어버리는 일이며 그것은 작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연속성을 잃는 일이다.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이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다 보면 종국에 가선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혼란, 자아의 상실에까지 이르게 된다.


치매는 기억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나를 잃어버리는 질병이며 나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과 연결을 맺을 중심고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즉 무의 존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영원의 시간 속을 헤매며 영혼을 잃어버리고 만 인간을 인간이라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그럼에도 그들이 순간 속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을 찾고자 노력하는 작가의 휴머니즘에 박수를 보낸다.


2부. 과잉 - 큐피드 병


조증에 관한 이야기이다.

90세의 한 할머니는 어느 날 자신의 근사한 변화를 느낀다. 힘이 넘치고 욕망이 생겼으며 모든 것이 즐거운 10대 소녀의 감정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다. 검사 결과, 원인은 70년 전에 걸린 매독이 잠복기를 거쳐 신경에 침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할머니는 건강상의 문제로 치료를 하고는 싶었지만 기분이 너무 좋아 이런 기분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점점 더 심해지리라는 것을 스스로 직감하고 있었다.


동일한 증상을 가진 농장에서 일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역시도 작가와 몇 번의 면담을 가졌는데 매우 창의적으로 의사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보인다. 면담 회차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조증의 기세가 강해져 나중에는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지만 그만큼 그의 창의력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자가 아주 차분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병원에 나타나게 된다. 검사를 위해 할돌이라는 약물을 투여받았는데 이 약물은 흥분을 억제시키는 효과를 내주는 약물이었다. 그리고 검사를 받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전에는 정말 생생하게 보였는데,
치료를 받고 나니 모든 것이 죽은 듯 보여요.


책에서는 엘도파와 할돌이라는 약물이 등장한다. 엘도파는 너무 가라앉고 처진 환자들에게 약간의 흥분과 자극, 창의성 등을 촉진하기 위한 약물로써 기능하고 할돌은 그 반대로 과흥분 상태의 환자들을 억제시키기 위한 약물로 사용된다.


우리의 세계에는 다양한 엘도파와 할돌이 존재한다. 술과 담배 마약과 같은 해로운 형태의 엘도파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때때로 사랑이나 결핍 증오와 같은 감정들도 잘 다루어 내기만 한다면 효과적인 엘도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반대로 할돌의 역할을 하는 것들 역시도 도처에 널려있다. 도덕과 법률, 관습과 예의 등 사회규범으로 불리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개념적으로 비슷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지 이것이 불법과 규범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변명으로 사용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세상은 멈추지 않는 시계추와 같아서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균형을 이룰 수 없다.


야당이 여당이 되고 여당은 다시 야당이 된다. 성장을 바라보며 달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분배와 평등에 눈을 돌리지만 그로 인해 불만이 나오는 순간 다시 성장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불안을 이용해서 성공을 취하려 하지만 막상 성공하고 난 뒤엔 불안이 그리워진다. 강아지가 자기 꼬리를 물기 위해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듯 현상은 꼬리를 물고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려 한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의 모습이다.


할돌과 같은 약물 투여를 통해 과잉을 억제하고 살다가도 기분 좋을 정도의 흥분 상태의 감정, 잃어버린 창의력이 안타까워 질병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약물을 끊고 다시 조증의 상태로 되돌아가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또 머지않아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약물을 투여하며 안정을 찾는 것이 인간일 것이다. 인생도 인간도 끝없이 진동하는 시계추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에피소드로 기억에 남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