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자기 앞의 생

혼자가 될 것을 직감한 한 아이의 처절한 투쟁

by 정 호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책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짧은 대화를 통해 로맹 가리의 삶과 사랑에 대한 관점을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다. 그는 평생 삶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던졌다.


작가는 권총을 이용하여 자살했다. 자력으로 생을 마감하는 모든 종류의 방식 중에 가장 성공 확률이 낮은 방법이 권총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확실한 두려움을 마주한 상태에서 강력한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정교한 신체의 컨트롤이 있어야지만 성공할 수 있기에, 물러설 곳 없이 진정 생의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사람만이 권총을 이용한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런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 작가라면 무릇 비관의 끝과 맞닿아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런 작가가 생의 맛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들렸다.


작가가 말하는 생의 맛이란 과연 무엇일까. 미친 사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생과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던 작가는 왜 스스로 생과 이별하는 선택을 했던 것일까. 서둘러 그의 외침과 마주하고 싶어 졌다.


작품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미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미쳤다는 표현은 작가의 의도에 충실히 따른, 진한 생의 맛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기준에 의하면 정상이 아니지만, 정상인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는 주인공 모모의 말처럼 정상이 아닌 사람들만이 정상적인 사랑을 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생의 맛이라는 것을 주인공 모모의 입을 빌어 작가는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 창녀의 자식을 돌봐주는 보모, 창녀를 관리하는 포주, 유대인과 아랍인과 흑인, 성소수자와 트랜스젠더, 퇴직한 노인과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주인공의 아버지, 약자들을 돌봐주는 의사 등,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이상하고 정상의 범주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듯 보이는 인물들을 설정해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차분히 써 내려간다.


로맹 가리는 왜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책을 냈을까. 아마도 세상이 자신에게 씌운 "로맹 가리 답다"라는 가면이 때때로 자신과 일치하지 않기에 답답함을 느꼈을 테다. 금년 추석 특집으로 제작된 나훈아 특별공연에서 나훈아는 "예술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워야 되기 때문에 대통령 훈장을 거부했다"라고 말했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책을 냈던 이유와 상을 받게 되면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나훈아의 말은 일맥상통한다. 특정한 프레임이 씌워져 본인의 의도를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하려는 세상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표시인 것이다.


로맹 가리다운 것이 무엇인가. 로맹 가리 스타일이 무엇인가. 나는 끊임없이 새롭고 다양하게 삶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뿐인데 세상은 나의 새로운 창작물에 대해 신선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로맹 가리"라는 이름에 갇혀있지는 않느냐고 세상과 비평가들에게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유명인이었던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냈다면 얼마간의 판매가 보장되어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인 이득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더해져 있지 않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자신의 외침이 순수하고 있는 그대로 세상에 전해지길 바랬던 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유대인과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 아랍인들 사이에는 종교와 국토로 복잡하게 얽힌 원한관계가 있다. 그 원한은 마치 한일관계에서의 그것과 같이 감정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풀기 힘든 매듭처럼 꼬여버렸는데 이 책에서는 유대인인 로자 아줌마와 아랍인인 모모의 사랑을 통해 해결하기 힘든 문제 상황의 경계에 서 있는 두 존재의 화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된다면 로자 아줌마의 안식을 요구할 것이라는 모모의 말에서 그의 인생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로자 아줌마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로자 아줌마 역시 수많은 아이들을 키우고 떠나보내는 일상 속에서도 열네 살의 모모에게 열 살이라는 거짓말을 해가며

모모만큼은 자신을 떠나지 않길 바래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할 때에 그녀의 깊은 외로움을 달래주고 마음에 안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모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대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는 두 인종이 서로에게 남은 것은 서로뿐이라고 반복해서 외치는 모습은 전 인류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작가의 바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의 이런 화해와 화합, 그리고 사랑에 대한 주제의식은 다른 캐릭터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포주이지만 친절하게도 로자 아줌마가 사는 건물의 사람들을 돌봐주는 은다 아메데 씨는 모모와 친구들에게 거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왕년에 권투 챔피언까지 지낸 남성스러움의 끝판왕일 것 같은 롤라는 여장남자로 스스로의 삶을 힘겹게 꾸려가면서도 로자 아줌마와 모모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하밀 할아버지는 노쇠하여 점점 건강을 잃어가고 있지만 모모의 굳건한 정신적 지주이며 첫사랑에게 건넨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60년 동안이나 첫사랑을 마음에 품고 있는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의 31개의 챕터 중 희망차게 마무리되고 있는 챕터는 단 3개에 불과하며 28개의 챕터에서는 끊임없는 슬픔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보다 낫다.
그것은 자연법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꿈이 오래되면 악몽으로 변한다.

심리적인 것보다 더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

그녀에게 너무 좋은 냄새가 나서 로자 아줌마 생각이 났다.

금발 여자가 내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녀는 무척 상냥했다. 그것이 더 유감스러웠다.

콜레라는 그냥 병이다.
창녀의 아이도 그냥 아이다.


챕터가 끝날 때마다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이런 문장들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너무도 무겁다는 느낌이 들어 책을 다 읽은 뒤 각 챕터의 마지막 문단만 다시 읽어보았다. 3개의 챕터를 제외한 모든 챕터의 마지막 문장은 관조와 회한, 슬픔이나 분노, 이별, 두려움, 무력감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문장 하나하나 천천히 곱씹으며 생각에 빠져들게 만드는 로맹 가리의 문장들은 분명 무겁지만 나의 인생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한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죽음은 사람에게 중요성을 부여해주고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온 사람을
더 존경하게 되기 때문이다.


생의 무게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찾았기 때문일까?

남들과는 달리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탓에 자신의 생 정도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죽음을 통해 타인으로부터의 존경을 완성하고 싶었을까? 저 두 문장을 통해 로맹 가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유를 들여다보려 애써봤지만 잘 모르겠다. 그는 왜 그렇게 마침표를 찍어야만 했던 것일까.


생이란 것이 아줌마를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있는지 낯짝도 안 보여요.

자장가를 들을 만큼 어렸던 적이 내겐 없었고 언제나 머릿속엔 다른 걱정들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알아버린 어린아이에게 신은 저주의 대상 혹은 무용의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무언가를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는 말은 도전을 머뭇거리고 변화가 두려운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많이 사용되었기에 익숙한 문장이지만 그 반대로 어려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문장은 많이 들어본 적이 없어 낯설었다.


어려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14살 아이의 말은 어떤 고난이든 헤쳐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간 스스로 해결해왔고,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무거운 삶의 무게가 느껴져 몹시도 안쓰러웠다. 지나온 생과 자기 앞의 생, 무엇을 더 무겁게 느끼고 있을까. 부디 모모의 앞에 남은 생은 조금 가벼워지기를 마음 깊이 바라본다.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조금 검색을 해봤더니 원제인 프랑스어가 갖는 의미는 "여생"이라고 한다. 즉 남아있는 날들 정도가 되겠다. 로맹 가리는 여생이라는 제목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엮어 앞으로 남아있는 생은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모모와 우리의 삶 속에서 슬픔은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챕터에서만큼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하며 희망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끊임없는 불행과 불합리 부조리 속에서도 결국 우리는 사랑을 바라봐야 한다는 작가의 처절한 외침은 아니었을까.


이 책은 너무도 강렬하여 기억에 남는 장면과 문장을 한 두 가지만 꼽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또렷하고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로자 아줌마가 숨을 거둔 뒤 모모가 지하실로 아줌마를 데리고 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다. 이미 사망한 로자 아줌마의 곁에서 초를 하나도 안 켜 두면 아줌마가 깨어나서 죽었다고 생각할까 봐, 초를 너무 많이 켜 두면 스스로의 비참한 모습이 드러나서 초라하게 느낄까 봐, 단 하나의 초를 은은하게 켜 두는 열네 살 모모의 행동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최선의 배려를 배우게 된다.


하밀 할아버지에게 던진 모모의 질문.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아갈 수 있나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로맹 가리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사랑하는 존재가 없다는 생각에 앞으로의 삶, 자기 앞의 생이 의미가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삶을 마무리한 것은 아닐까. 생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사람에게 의미는 그처럼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잃었지만 아직 아르튀르가 남아있었다. 아르튀르가 사라진 뒤에는 또 다른 아르튀르가 모모의 삶을 지탱해 주리라. 우리의 로자, 우리의 아르튀르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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