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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pr 16. 2021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들

사실과 가치, 아름다움을 구분 짓는 일은 가능한가

시쳇말로 말로 "얼굴값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구설수에 오르거나 구설수에 오를만한 행동을 저지르는 경우 그의 외모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된다. 반대로 외모가 출중하지 못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행위를 저질렀을 때에도 "그렇게 안 생겼는데"혹은 "착하게 생겨서 왜 그랬데"라는 말과 함께 그의 외모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옳고 그른 것, 즉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왜 "미"가 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 선한 것은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은 악한 것일 뿐인데 왜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이고 추한 것은 악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일까. 철학은 이러한 사고 구조의 이유를 찾기 위해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 단어들이 있다. 동굴의 비유, 선의 이데아, 진선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자면 동굴의 비유란 사실 이상은 따로 있고 우리는 이상의 그림자, 즉 허상만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는 것이며 플라톤은 그 이상을 "이데아" 또는 "선"이라고 칭한다. 무수한 이데아와 선 가운데에서도 최고가 되는 절대적인 선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절대선"이며 플라톤은 이 절대선의 종류로 "진, 선, 미"를 주장한다.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 메트로폴리스라 불리는 거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었으며 그에 따라 그는 강력한 권위와 명예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플라톤의 사상은 후대에 계승되어 내려오면서 여러 인물들에 의해 각색되며 필요에 의해 다양하게 적용되었다.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적 사고관이나 옳고 그른 것이 존재한다는 이분법적 사고, 그리고 이상과 절대적인 존재라는 개념을 인격화시켜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 통치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종교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의 사상은 세상에 다양하고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며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 깊은 곳에 관여하고 있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앞서 이야기한 도덕 판단의 기준에 "미"가 애매하게 섞여 들어가는 이유는 플라톤이 진, 선, 미를 이야기하며 선을 기준 삼아 진과 미를 통합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선한 것은 진리이고 아름답다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 사람의 사상과 철학이 이토록 강력하게 인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우면서 한편으로는 두렵다는 생각마저 든다.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는 각각 분리시켜서 바라봐야 조금 더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것들의 경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구분해 내기가 어렵고 진선미가 서로 미묘하게 섞여서 작동하는 세상살이의 메커니즘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의도를 가지고 진, 선, 미를 섞어서 사용하여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거짓을 참된 것으로 속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려는 사람이나 집단을 멀리할 필요는 있다.


미남미녀 정치인, 서울대 출신 연예인, 패륜을 저지른 학자, 착한 기업, 아름다운 소비자, 참된 일꾼 등의 단어들을 한 번 살펴보자.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미남이면 어떻고 추남이면 어떠한가, 교육부에서 발행한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에는 갈등이나 대립을 조정하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동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활동을 정치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를 진행하는 정치인에게 굳이 미남 미녀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이라는 플라톤적 세계관을 건드려 이 정치인은 아름답기 때문에 선하고, 선한 것은 옳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서울대 출신 연예인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다는 말인가. 연예인은 대중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 존재의 당위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서울대라는 수식어는 철저히 계산되고 의도적인 수사에 불과하다.


패륜을 저지른 학자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학자는 본디 "진"의 영역에 해당되는 일을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패륜을 저질렀다는 사실,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도덕적 결함이 발견되는 즉시, 즉 "선"의 영역에서 선하지 못하다는 판결을 받는 즉시 그의 학자로서의 명성과 그간 이루어온 업적은 모두 무용의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외 예로 든 착한 기업이나 아름다운 소비자, 참된 일꾼 등의 단어들도 마찬가지이다. 철저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기업이라는 조직에서 착하다는 이미지를 굳이 가져가려는 노력을 하는 이유는, 착한 것은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은 참된 것, 즉 우리 기업은 올바른 기업이고 다른 기업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그로 인해 다른 기업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에서 발현되는 마케팅 수단에 불과하다.  


이런 모든 표현들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어떠한 이득을 목적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이처럼 플라톤을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특히 사회 각 영역에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선진 사회로 발전할수록 기능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다양한 것을 추구해야 하며 도덕성이 그 여러 덕목 중 하나로써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다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의도를 가지고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려는 대상에 대해서 만큼은 속지 않으려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과연 나쁘다고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현재를 살라는 말이 있다. 철학도 기술도 언제나 현재와 맞물려 작동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아무리 대단한 기술도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 구시대의 산물로 여겨지고 철학적 사상 역시 시대적 흐름이 달라지면 흘러간 옛 생각으로 치부된다. 현재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여 작동하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와 자본주의라는 경제제도 속에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본주의적 스킬이 나쁘다고 외치는 것은 과연 선한 일인가. 제도의 혜택을 받으면서 제도를 비난하는 일은 과연 선한 일인가.


게다가 인간에게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그것이란 앞에서 말한 진, 선, 미를 명확히 구분 지어 인식하고 판단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란 본디 인식의 한계가 존재한다. 인식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아무리 육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각이 존재하고 실존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추상적인 사고력이 발달했다고 한들, 끝내는 인식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 가운데 가장 인간의 인식에 쉽게 닿아있는 것은 어쩌면 미와 추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에 쉽게 현혹되고 그것이 곧 선한 것이며 참된 것, 악한 것이자 거짓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것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말이 힘을 잃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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